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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근대 철학 정리) _ 책 정리 [1-3]

안녕하세요!

오늘도 고대, 중세에 이어서 근대 정리 시작해보겠습니다!

근대가 처음이시라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고대 철학 정리) _ 책 정리 [1-1]

안녕하세요! 오늘은 책 한 권 자체 리뷰가 아닌, 큰 단락도 아닌, 작은 단락 하나를 정리해볼 거예요 이 시...

고대부터 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성 중심의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한다. 물질적 권력을 획득한 시민계급의 부상과 관련된다. 그들은 신 대신 인간이 중심인 이성의 시대를 열었다.

중세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싸움이 보편논쟁에서 실재론과 유명론에 있었다면 근대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논쟁이다.

실재론은 개별적인 개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보편이 중요하다. 합리론도 유사하게 개별적으로 관찰되는 개체보다 변하지 않는 수학적, 관념적 이성을 중요시했다. 이 둘은 진리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어딘가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닮았다.

유명론은 보편이 존재하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개체라는 입장이었다. 경험론도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현실 세계의 개체를 관찰하고 탐구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합리론과 경험론은 "어떻게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방법을 찾는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처럼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디해 탐구하는 분여를 철학에서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잠시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해 살펴본 후 근대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존재론"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라면, 인식론"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답변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던지는 방식에 있다. 존재론은 "~있는가?" "~은 있다"로 표현된다. 인식론은 어떻게 우리가 특정 존재를 알 수 있는가에 대해서 묻는다. "~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의 술어로 표현된다.

존재론이든 인식론이든 대답은 거의 정해져 있다고 봐야한다. 존재론은 그 대상이 무엇이건 "있다" "없다" 둘 중 하나의 대답으로 정해져 있다. 인식론 역시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성을 통해" "경험을 통해" 둘 중 하나의 대답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해하는 방법은 머리로 생각해봐서 알거나(합리론), 직접 봐서 알거나(경험론) 둘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외계인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답변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이라고 한다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이성"을 제시한 것이다. 인식론에 대한 답변으로 이성을 제시하는 입장합리론이라고 한다. 실제로 외계인과 접촉해서 눈으로 확인해야만 외계인이 있다고 경험을 해야 확신할 수 있다는 주장경험론이라고 한다.

고대와 중세의 철학이존재론 중심의 철학이었다면 근대 철학은 인식론적 철학이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근대 사람들이 궁금해 했던 것은 진리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고, 대답으로서 합리론과 경험론이 제시된 것이다.

합리론 - 데카르트 : A

합리론은 합리주의, 이성주의라고도 한다. 인간의 이성이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입장을 말한다. 프랑스나 독일에서 발전되었다고 해서 "대륙 합리론"이라고도 부른다.

철학의 거대한 물줄기를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방향 전환한 대표적 인물이 데카르트다.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방법으로, 그는 반대로 모든 것을 의심해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다 보면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가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을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지식을 감각지식, 일반지식, 보편지식으로 나눠서 의심해보기 시작했다.

먼저 "감각지식"을 의심해보자. 감각은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의 다섯가지로 감각틀 통해 들어오는 정보는 불확실하고 나를 속이는 경우가 대다수다. 물이 든 컴에 꽂힌 빨대는 곧다는 것을 알아도 꺾여 보인다. 코가 막히면 아무냄새도 맡지 못하고, 정신을 쏟고 있으면 나를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을 때가 있다. 감각을 통한 지식은 믿을 수 없다.

다음으로 "일반지식"을 의심했다. 과학적 이론은 다양한 관찰을 통해 "귀납적"으로 정리된 지식이다.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와 같은 일반화된 지식은 과거의 무수히 많은 개별적 사실을 종합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귀납법은 무수히 많은 관찰을 한다 해도 언제나 과거의 관찰에 한정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귀납법은 언제나 미래에 틀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지식은 불확실하고 의심 가능한 지식이다.

마지막으로 데카르트는 수학과 기하학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는 이런 지식을 "보편지식"이라고 불렀다. 보편지식은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 연역적으로 도달한 지식이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정의는 "한 직선 위에 있지 않은 세 점이 이루는 선분으로 이뤄진 도형"인데 이러한 정의는 경험적 관찰을 통해 얻은 지식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추론해서 얻은 지식이기 때문에 수학이나 기하학의 지식을 의심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극단적으로 가상의 상황을 만들어 끝까지 의심해보려 했다. 그가 제시한 상황은 "수학적 사실을 항상 틀리게 만드는 악마의 존재"였다. 데카르트는 1+2는 사실 3이 아니라 4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악마가 나를 속이기 위해 1+2가 3인 것처럼 생각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을 제시한 것은 보편지식이라 해도 절대 의심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결국 닿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던 그 끝에 데카르트의 손이 극적으로 닿았다. 어떠한 극단적인 가정으로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실 이 문장은 후에 데카르트에 의해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가 되었다. 고로를 뺀 것이다. "고로"를 넣을 경우 마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나의 존재함이 발생되는 것처럼 보인다. 데카르트가 생각하기에 "생각한다"와 "존재한다"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해 있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이 명제를 의심할 수 없는 제1명제라고 불렀다. 이 명제는 나눠서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부터 알아보자.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생각한다"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명제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지 의심하는 순간마다 내가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로써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된다.

다음으로 "나는 존재한다"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가 생각하고 있음이 확실하다면 나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차례로 두 문장은 의심할 수 없음이 도출된다.

이제 "나"를 증명했으니, 데카르트에게 남은 것은 "세상"에 대한 증명이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지금 굼을 꾸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식물인간으로 십 년째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지금 보이는 것들은 당신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세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진짜임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데카르트는 세상을 증명하기 위해 신의 관념을 끌어들였다. 다시 제1명제로 돌아가자.

내가 생각하고 존재하는 것은 증명되었다. 그런데 내 생각 속을 들여다보면 독특한 관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신"에 대한 관념이다. 이 관념이 독특한 것은 신은 개념상 완전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도 의심하고 세상도 의심할 정도로 불완전한 존재인데, 나에게는 이미 "완전함"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질서에서는 무질서가 도출될 수 있어도 무질서한 것에서 질서가 도출되지 않듯,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함은 도출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내가 신이라는 완전한 개념을 가질 수 있는 것외부의 절대적 존재가 나에게 신의 개념을 주입해주어서일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 존재로서 신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세계"를 증명할 차례다. "신"은 개념상 완벽하기 때문에 이 개념 안에는 성실함도 포함될 것이다. 신은 방만하거나 불성실하거나 나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성실한 신은 나를 속이지 않고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이 있다면 "세계"는 존재해야만 한다.

현대인이라면 도대체 이게 무슨 증명인가 싶겠지만, 나와 세계를 증명하는 과정은 내용보다 형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데카르트 이전까지의 시대는 신 중심의 중세였다. 인간과 현실 세계는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의 존재 의미는 신으로부터 도출되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사유는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모든 세계의 증명을 시작한다. 인간의 이성이 우선이고, 신과 세계는 이로부터 파생되어 증명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작업을 평가해볼 차례다. 내가 어떻게 신과 세계를 증명할 수 있는지의 인식적 측면을 탐구했다. 따라서 그는 인식론적인 물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그는 현실 세계를 관찰하거나 전화 설문을 돌려 통계를 내는 방법이 아니라, 순수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추론만을 진행했다. 즉 데카르트는 합리론적 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경험론 - 베이컨 : B

경험론자연 세계에서의 감각적인 경험만이 지식의 원천이 된다고 보았다. 변화하는 경험 세계를 토대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경험론은 합리론에 비해 상대주의적인 측면이 강하다. 또한 개별적인 개체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중세의 유명론과도 연결된다.

중세 교회의 그림자가 다 걷히지 않았던 근대 초기에 경험론의 주장은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측면이 있었다. 경험론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진리는 자연에 있고, 우리는 자연에서 규칙과 질서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무신론적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론은 중세의 신중심주의를 끝내근대 이성중심주의와 근대 과학을 탄생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경험론은 영국에서 발전되어왔기 때문에 "영국 경험론"이라 불리면서 대륙 합리론과 대응되는 말로 사용된다.

그는 기존 학문을 "우상론"으로 비판했고, 새로운 학문 방법으로 "귀납법"을 제시했다.

베이컨은 우선 우상론으로 기존 학문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여기서 우상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말하는 것이다. 베이컨은 편의상 네 가지 이름을 붙였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그것이다.

"종족의 우상"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편견을 말한다.

Ex) 꽃이 웃는다, 새들이 노래한다.

"동굴의 우상"은 개인이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오류를 말한다.

-자신의 경험이 전체의 일반적인 경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시장의 우상" 잘못된 언어 사용에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보통 주어에 들어가는 단어가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

Ex) 신, 악마, 요정, 도깨비

베이컨에 따르면 사람들은 관찰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하는데, 이럴 경우 혼란에 빠지고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극장의 우상"권위에 수긍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기존에 전통으로 확립되어 있는 이론들의 권위에 의지하려는 태도

그에 다르면 기존의 전통적 이론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연 세계를 직접 관찰하고 검증하는 방식으로만 학문에 대해서 논해야 한다.

베이컨은 기존 학문 체계를 비판한 후 그에 대한 대안으로 귀납법을 제시했다. 사실 귀납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체계를 세웠던 방법론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역법을 더 중요시했는데, 베이컨은 이를 비판하는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법보다 조금 더 복잡한 형태의 새로운 귀납법을 제시한 것이다.

우리는 큰 차이도 없고 더 복잡해진 귀납법 대신,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연역법과 귀납법의 차이를 알아보고, 어떤 면에서 베이컨이 연역법을 비판했는지 알아보자.

연역법보편명제에서 특수명제를 이끌어내는 추론법이고 귀납법은 반대로 특수명제로부터 보편명제를 이끌어내는 추론법이다.

근대 철학은 중세 철학의 연장이라고 봐야한다. 중세의 실재론자들처럼 근대 합리론자들은 보편 개념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들은 보편으로부터 추론을 시작하는 연역법을 추구했다. 반면 중세 유명론자들처럼 근대 경험론자들은 특수를 더 중요시했다. 그래서 귀납법을 강조했다.

연역법보편에 대해 알면 무수히 많은 개체의 속성을 일일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효율적이고 완벽한 추론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보편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면 우리는 모든 특수의 특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편의 속성이 A라고 한다면 X도, Y도, Z도 필연적으로 A의 속성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베이컨은 연역법이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주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연역법은 지식의 확장 없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특수에서 확인하는 것뿐이다. 학문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때, 연역법학문의 진보에 있어서 쓸모가 없다.

베이컨은 개별적은 특수를 종합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보편명제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빨래를 하고 있는 X씨는 얼굴이 빨간색이다. 낮잠을 자는 Y씨도 얼굴이 빨간색이다. 술 마시고 있는 Z씨 역시 얼굴이 빨간색이다. 이를 토대로 공통점을 추론할 때, 비로소 보편자로서의 인간의 속성이 "빨간색"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가 귀납법을 통해 정말로 비판하고자 한 것은 아무런 경험적 근거도 쌓아 올려진 중세의 종교화 철학이었다. 베이컨은 누구나 관찰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특수한 개체로부터 경험적 자료를 쌓아 올린 새로운 학문 체계를 꿈꿨다. 베이컨의 경험주의는 자연 과학이 발전하는 데 철학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베이컨의 작업을 평가해볼 차례다. 그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힌 것이 아니었다. 대신 우리가 오류에 빠지는 상황을 설명하고, 학문의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물음은 인식론에 집중된다. 다음으로 베이컨은 진리를 획는 하는 방법으로 감각적 세계에서의 경험 자료들을 강조했다. 즉, 그는 경험론적 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관념론 - 칸트 : A+B

합리론은 보편적 이성을, 경험론은 개별적 경험을 그 방법으로 제시했다. 이 두 체제를 종합함으로써 소모적인 논쟁을 끝마친 인물이 칸트다.

우리가 철학사를 탐구하며 알게 된 것은 철학 전체는 핵심적인 두 가지 전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했다는 것은 철학 전체의 두 사조를 종합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칸트는 2000년 넘게 이어져오던 거대한 논쟁을 종결지은 것이다. 이 경이적인 인물의 업적은 "관념론"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관념론은 일반적으로 실재론과 반대되는 언어로 사용된다.

존재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라면 인식론은 그 존재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존재론은 실재론에, 인식론은 관념론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과 실재론은 "나"의 바깥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갖는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어 "사과는 뭐지?" "맛은 있나?" "무게가 얼마일까?" 같은 나의 바깥에 있는 존재의 본질이나 상태에 대한 질문이다.

인식론과 관념론은 "나"의 안쪽에 관심을 기울인다. 예를 들어 "나에게 어떻게 사과가 보이게 된 것일까?" "내 눈앞의 사과는 정말 내 외부에 있을까?" 등이다. 철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이식에 대한 탐구가 진행되면서 내 눈앞에 있는 세계가 실제 세계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점차 확산되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칸트의 관념론이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경험으로 체험되지만, 엄밀하게 생각해보면 신비한 측면이 있다.

눈으로 본다는 것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본다는 것은 광원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사과에 충돌한 후 튕겨져 내 수정체를 통과해 망막을 자극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본 것"이 아니다. 빛이 망막을 자극하면 망막은 빛을 전기적 신호로 변환해서 뇌로 정보를 보낸다. 뇌는 눈도, 귀도 없는데 전기적 신호가 여기저기서 흘러들어온다. 그 정보들을 해석한다. 그렇게 해석을 거치면 뇌는 그제야 사과의 이미지를 나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실제 사과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뇌가 그려준 영상을 보는 것이다.

박쥐가 사과를 인지하는 과정을 상상해보자. 사과에 부딪힌 후 튕겨나온 초음파는 박쥐의 귀에 닿는다. 그러면 고막이 울리고 청각세포가 자극된다. 그로부터 발생한 신호가 박쥐의 뇌로 전달된다. 뇌는 눈도, 귀도 없는데 신호가 여기저기서 들어혼다. 그 디지털화된 신호를 해석한 뇌는 그 결과물을 이미지화해서 박쥐에게 드러나게 해준다. 박쥐는 귀로 들었지만, 머릿속에 이미지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눈으로 본 사과와 박쥐가 귀로 본 사과 중 실제에 더 근접한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인간인 우리가 보는 사과일까?

본다는 것은 외부의 사물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머릿속에서 해석된 그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세상을 둘로 분리했다. 내 눈앞에 드러난 세계를 "현상"이라고 부르고, 현상 너머의 진짜 세계를 "물자체"라고 불렀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상뿐이고, 사물의 실체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이미지로서의 사과일 뿐,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실제 사과는 결코 감각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른 각자의 현상 세계에 매몰되어 있는 주관적인 존재인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도 너무도 다른 자신만의 세계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주관주의로 빠질 위험에 처한 이론을 현명하게 구제해냈다. 칸트는 모두의 사고 구조가 보편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세계가 개인의 주관에 함몰되는 문제를 극복해냈다. 즉 우리 각자가 자신의 머릿속 세강은 현상을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현상을 드러내는 사고의 구조, 뇌의 형식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사실은 유사한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물자체의 세계는 결코 알 수 없다. 개인은 주관적으로 현상 세계를 구성하지만 우리의 사고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동일한 세계를 본다.

이제 진리는 "주체의 판단형식"에서 찾아야 한다. 이성은 주관적인 독단에 빠지기 쉬워서 위험하고, 경험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으니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사고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사고의 형식을 분석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칸트는 스스로 이 방법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렀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사고의 전환을 급진적으로 바꾸며 진리를 찾아냈던 것처럼 자신의 방법이 주관과 객관을 동시에 구제함으로써 진리를 드러냈음을 자신한 것이다. 주체의 판단 구조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해냈다.

니체 : C

근대가 걸출한 철학자를 낳으면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종합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회의주의적 사조도 그 모습을 유지해나갔다. 염세주의나 실존주의는 종교, 이성이라는 기존 가치를 거부하고 개인의 삶과 개체의 한계에 대해서 논했다. 이러한 철학적 조류는 니체에 이르러 극단화되었고, 현대의 포스트모던이 등장하는 길을 열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기반한 윤리관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도덕관으로 도덕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갔다. 니체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좋음과 나쁨 그리고 선과 악을 구분해야 한다. 보통 이 어휘들을 섞어서 사용하는데, "좋음"과 "선"은 다르다. 예를 들어 명품 핸드백은 좋은 것이지만선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싸구려 핸드백은 나쁜 것이지만, 악한 것은 아니다.

니체를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는 선악의 구분 대신 좋은과 나쁨의 구분이 있었다. 여기서 좋은 것은 주인의 생활 방식을 말하고 나쁜 것은 노예의 생활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생활 방식 뿐만 아니라, 신분 차이로부터 기인하는 덕목이 달랐다. 주인의 도덕진취성, 확실성, 결단력, 창조력 등이 내포되어 있다. 자신이 주인이므로 법을 만들거나 폐기하거나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한다. 그는 도덕에 구속받지 않고 도덕을 창조해나간다. 주인의 도덕은 건강하고 좋은 것이다. 노예의 도덕겸손, 근면, 친절, 순종, 질서의 순응 등이 강조된다. 니체는 순종적이고 겸손하고 착해야하는 노예 도덕의 본질이 분노와 원함임을 밝혔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강압되는 부자연스럽고 억눌린 도덕이다. 그렇기에 노예의 도덕은 나쁘다. 억눌린 노예들의 원한이 그들의 도덕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원한의 도덕을 근본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고대 이집트부터 로마 시기의 노예는 유대 민족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도덕은 원한으로 시작되고 부자연스러운 형태를 띤다. 주인에 대한 그들의 원한은 점차 왜곡되고 이상화되어 결국에는 독특한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재탄생한다. 노예들은 자신들이 가진 도덕적 덕목을 "선"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뒤바꾼다. 그리고 주인의 덕목은 "악"이라는 개념으로 가치절하한다. 결국 유대인에 의해 "좋음"은 "악"이 되고, "나쁨"은 "선"이 되는 가치 전도의 상황이 발생한다.

문제는 유대인에게서 발생한 그리스도교가 선과 악의 개념을 공고히 했다는 데 있다. 그리스도교는 유럽을 장악하면서 유럽인들에게 선과 악이라는 원한의 도덕관을 깊게 심어놓았다. 무엇인가 억눌리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로 유럽이 병들어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에 따르면 주인의 도덕자신에 대한 무한한 긍정에서 출발하는 건강한 도덕이지만, 노예의 도덕타인에 대한 원한에서 비롯된 병든 도덕이다.

병든 사회에 대한 니체의 처방초인사상영원회귀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영원회귀는 같은 우주가 무한히 처음으로 동일하게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니체 사상의 주요 개념이다. 쉽게 말해서 나는 나의 삶이 끝나고 정확하게 나의 삶을 그대로 다시 살게 된다. 이것은 윤회와는 다르다. 윤회는 다른 존재로 환생하는 것이지만, 영원회귀는 지금 자신의 삶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우리로 하여금 "삶"과 "순간"이라는 두 종류의 시간의 가치를 뒤집어 놓는다. 영원회귀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삶은 유한하지만, 이 순간은 무한히 반복되는 영원한 시간임을 알게 된다. 영원회귀를 깨달은 존재는 이제 삶의 방식이 바뀐다. 먼 미래의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지금 이 순간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지금 이 순간을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 왜냐면 지금 이 순간은 무한히 반복될 영원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근대의 철학적 흐름을 알아보았다. 절대주의의 측면에서 합리론이 등장했다. 합리론은 이성적 탐구를 강조한다. 반면 상재우의의 측면에서 경험론은 경험적 관찰을 주장한다. 인식록의 두 측면의 종합으로 칸트는 관념론을 제시했다. 판단 주체의 분석에서 찾는 칸트의 혁명적인 사고 전환은 고대부터 중세를 지나 근대에 이르는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철학의 종합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주요 흐름과 함께 회의주의도 염세주의나 실존주의의 형태로 등장했다. 니체에 이르러 집대성된 회의주의는 근대를 마감하고 현대의 포스트모던을 위한 시작을 열었다.


오늘은 역대급 많은 양이었던 거 같아요..

저는 손목이 아프기 시작해서 얼른 마무리하고 쉬러 가볼게요 ㅠㅠ

다음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철학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오늘도 저의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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