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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성경

권치남님 2022. 12. 24. 15:12

 

곡성(哭聲) - 닭이 몇 번 우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종교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본인의 의견을 나누는 것은 감사하겠지만, 종교적인 다툼은 없었으면 한다.

 

제멋대로의 후기다. 어떤 후기도 참고하지 않았으니 조금 낯설게 보이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디테일한 장치, 요소들의 연계성에 대해서는 차치할 예정이다. 큰 그림에서 보고자 한다.

 

,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물론 영화를 감상했던 분들을 위한 글이므로 줄거리 또한 생략하겠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는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 37 - 39 

 

뜬금 없이 성경구절을 들이댄다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하기에 무리가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먼저, 이 구절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기독교에서도 여러 종파가 있지만 여러 곳을 경험해 본 토대로 아주 보편적인 내용만 적어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그들의 죄를 한 번에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미리 예언한 대로 3일 만에 부활하게 된다.

 

이 것을 온전히 믿지 못한 예수의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의 모습을 보고서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확신하지 못한다. 이쯤 되니 예수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온전한 믿음을 느끼지 못한 것 같다.

 

'믿음만으로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 , 너희 눈 앞에 있는 나를 직접 보고, 만져도 보고, 직접 느끼거라. 그렇게라도 내가 다시 부활했음을 직접 깨달으라. '

 

누가복음의 성경구절은 위 구절과 같은 의도의 예수의 말이 아니었을까 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본인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성경을 통해 예언한 그대로 탄생하였으며,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무수한 많은 기적을 행했었고 특히 그의 제자들은 그것을 아주 가까이서 항상 봐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한 대로 부활한 자신을 보고도 믿지 못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답답함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하나님이자 예수님인 그분께서 인간에게 답답함을 느껴서 화를 냈을 리는 없겠지만, 비종교인을 위해서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해본 것이다)

 

, 그러면 우리는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왜 제자들은 예수를 눈 앞에서 보고도 믿지 못한 것일까? 나였다면 어땠을까?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한 것을 믿는다는 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신념 혹은 믿음이 아닐 경우 쉽지 않다.

 

제자들 중에는 부활이 있기도 전부터 전심으로 예수를 믿었던 이도 있었겠지만, 종교적 신념보다는 인간의 이성이 앞서 많은 기적을 보고도 온전하게 믿지 못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본능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상상한 바를 사실 마냥 믿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러한 오류를 피하기 위해 직접 경험하려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눈 앞에서 무수한 기적을 보고도 부활하여 눈 앞에 나타난 예수를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표현한 성경 역시 그러한 인간의 본능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 그럼 영화로 돌아가 보자. 영화 후반부로 가서는 선한 존재로 보이는 무명(천우희 분) '닭이 3번 울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종구(곽도원 분).

 

관객의 입장에서도 그쯤에서는 이성적으로만 판단했을 때 무명의 말을 믿을 수도 있지만, 역시 종구처럼 마음속으로 갈팡질팡 하신 분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우리 역시 명백하게 '외지인'이 악마라는 것에 대부분 판단을 내리고 있었지만, 일광(황정민 분)이 중구의 집 앞에서 피를 토하는 장면부터 우리가 그동안 여러 영화를 통해서 경험한 오컬트 장르의 흐름에 입각해 자연스럽게 무명이 악마라는 결론을 순간적으로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외지인'이 악마라는 메시지를 수도 없이 받았다는 것이다.

 

편집 상 헷갈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장면에서 우리는 '외지인'이 악마라는 확신을 가지고 보면서도 몇 순간만에 ', 잘못 생각했구나.'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이 역시 인간의 본능을 이용한 감독의 농간이라 생각된다.

 

나홍진 감독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답을 주고, 여러 가지 경험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그들을 보며 함께 정신을 못 차리는 관객에게 또한 희열을 느꼈을 것 같다.

 

결계를 굳이 보여준 것도 무명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감독의 증거제시가 아니였을까

 

부제인 양이삼 역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깊숙한 곳 까지 들어가 '외지인'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분명 영화 중반부에 성당의 신부가 중구에게 당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종교적, 미신적 현상과 무관하다고 하였다. 물론 신부가 안일하고 무관심하게 말한 것을 우리는 보았지만, 부제인 양이삼에게는 그것 또한 신부를, 천주교를 믿는 종교인으로서 따라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외지인'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러 갔던 것은,  '외지인'이 악마이든 선한 존재이든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본인의 종교적 신념을 이어갈 수 있다는 판단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 역시 많은 것을 믿음으로 해결해야 하는 신부에게는 적절치 못한 행위였던것 같다.

 

종교 역시 이성과 경험, 그리고 믿음 사이에서의 인간 본능과의 싸움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일들을 겪으며 혼란스러워진 양이삼 이 영화는 2시간 30여분 동안 믿기 힘든 현상들과 그것들에 대한 의심, 갈팡질팡 하는 인간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관객에게도 어떤 것 하나 확실히 판단하기 힘든 내용으로 일관성 있게 이어나가며, 심지어 영화를 보신 많은 분들의 후기 또한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결론이 뭐야?' 등등이 많았다.

 

영화의 등장인물을 통해서도, 그것을 본 관객을 통해서도 무엇인가 확신을 하기 위한 인간의 과정과 그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 했을 때의 혼란스러움을 던져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경험과 이성, 판단이 다 뭐야?

 

철헉사에서 경험과 이성은 그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주제이다.

 

깊이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각설하겠다.

 

다만 철학사에서 우리가 아는 유명한 많은 이들은 경험과 이성, 합리적 판단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고 싸워왔다.

 

그 중요성이 크기 때문에 근대에 이르러 칸트는 이에 대한 내용을 학()으로 정리하고 이성과 경험에 대해 정리하려 애썼다고도 볼 수 있겠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것은 학문을 떠나 실생활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이다.

 

초자연적 현상, 종교적 믿음, 외계 등 평범한 삶에서 답을 찾고 싶어 하는 인간의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구를 강제로 막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니, 막고 안 막고를 떠나서 인간에게 이러한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나홍진 감독은 이런 인간의 형이상학적 사고 활동을 인정하고 활발히 하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이 만약 무명 앞에 선 종구였다면?

 

중구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초기 어느 순간까지는 마치 방관자 마냥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 이는 그 전까지 평화로웠던 곡성과 중구의 일상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터지고 중구의 딸이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중구는 그제야 사건을 파헤치려 했던 것이다.

 

만약 중구가 사건사고가 많은 마을에 있었다면, 조금 더 일찍부터 사건을 해결하려 하고, 정확한 판단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중구처럼 가족의 생사가 달린 결정을 할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 중 누군가 중구가 되어 저 자리에 서 있다면, 그 누구라도 닭이 3번 울기 전까지 미친 듯한 괴로움으로 자신의 온갖 경험을 되새기며 판단하려 애쓸 것이다. 결국 중구는 닭이 2번 울었을 때 자신만의 판단을 내 것이다.

 

살면서 크고 작은 결정을 하는 순간이 올 때 우리 중 누군가는 닭이 채 울기도 전에 돌아갔을 수도

누군가는 1번 울었을 때 갔을 수도 누군가는 3번 모두 울고 난 이후에 갔을 것이다.

 

결정에 따라 모두 다른 결론을 맞이할 것이다.

 

그 어떤 결론을 마주하더라도 결정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중 변하지 않는 공통점은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일 것이다.

 

최선의 선택과 판단을 하기 위한 연습은 필수적이라고 봐도 과하지 않겠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기로. 중구는 닭이 2번 울 때까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닭이 몇 번 우는 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순간에 우리가 하는 결정과 판단이 어떤 과정에서 이루어졌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영화는 우리가 살면서 해야할 결정이 빛을 발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영화였다.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개똥철학과 성경

우주와 생명의 근원, 삶과 죽음, 인생의 의미 등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보통 개똥철학을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적어도 한때는 개똥철학자가 된다. 개똥철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은 쓸데없는 생각, 정답이 없는 우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 답이 있다. 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그 답을 알지 못한 인생은 다만 헛될 뿐이라고 단언한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크게 세가지이다.

성경이 말하는 /첫째는 창조주가 있다는 진리. 성경은 물질과 시간과 공간이 모두 무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능력으로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창세기 1장 1절의 선언이다.

 

이 진리가 진리가 되지 않는 자에게 성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창조주의 창조를 건너뛴 채 성경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창조는 그 속성상 완전무결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창조주의 속성이기도 하다. 영원과 무한, 전지전능, 무소불위, 유비쿼터스 등을 전제하지 않는 창조주는 어불성설인 것이다. 창조에 시비를 거는 이유는 창조주를 진정으로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두번째 진리는 인간은 모두 악하다는 것이다.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혹은 어렴풋이나마 알고 인정하는 사람들도, 인간은 예외없이 악하다는 성경의 선언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 나아가 인간이 악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천명한다. 그것은 악에 악을 더할 뿐이라고.

성경이 말하는  /세번째 진리는 악한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창조주의 일방적 약속이다.

그 약속은 온전히 창조주의 방식과 경륜으로 이루어진다. 그 일에 '악'한 피조물은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다. 다만 구원은 스스로가 '악'임을 아는 피조물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구원의 필요를 모르는 피조물에게 구원은 다만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되 단지 교양을 쌓고 식견을 넓히며 지식욕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죄가 무엇인지 알고 스스로의 악을 절감하며 의의 길로 가고자 하는 자에게만 성경은 비밀을 드러낸다.

참으로 진리를 찾고 진정으로 진리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자만이 진리를 얻는다.

 

[출처] 개똥철학과 성경  [출처]

요한복음 187절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에 창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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