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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9월 추석 연휴 때였다. 연휴 동안 독서할 요량으로 서점에서 ‘3일기도의 영적 파워다시 보는 세상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3일기도의 영적 파워를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쓴 이에스더 원장은 194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농촌목회와 개척교회를 위해 생명을 걸고 기도하던 중 사별했다는 대목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나의 아내도 비슷한 나이인 45년생이고, 나도 아내와 사별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 중 다메섹 체험기 간증은 아내가 생전에 앓다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버린 상황과 똑같았다. 그때 이 책이 있었다면, 3일기도원을 찾아 작정기도라도 했으면 한 맺힘이 덜했을 텐데. 그렇지만 아내 병에 너무 무관심했기 때문에 죄책감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너무나 무관심한 죄인이었다. 19971013일 퇴근시간 1시간을 남겨놓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택시로 병원에 실려 왔는데,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라며 빨리 오라는 전화였다. 응급실 침대에 잠자는 듯 누워 있는 아내를 본 순간 하나님 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며 소리만 쳤다. 눈물조차 나오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찾으면서 한편으로는 원망도 했다. 그러나 지금 아내의 몸은 갔지만 영혼과 유품은 그대로 내 주변에 맴돌고 있다.

 

아내와 사별한 후에도 다섯 식구가 새벽예배로 드린 가정예배를 삼남매와 계속 드렸다. 우리 다섯 식구가 모두 세례받은 동원교회에는 이사 후에도 배반치 않고 계속 나가고 있다. 99년 정년퇴직을 하고 두 딸은 믿음 좋은 배필을 만나 잘살고 있다. 아들도 군 제대 후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잘 다였고 박사학위도 밭았다.

 

안방이 흔들리면 내가 흔들리고 내가 흔들리면 자식들이 흔들려 가정은 넘어지기 쉽다는 생각에 안방을 든든하게 하기 위해 더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이제 안방은 부부가 잠자는 방이 아니요, 기도 방이요, 독서 방이요, 홀로 사색의 방이 되었다. 그렇다고 생활이 침체되거나 은둔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즐겁고 보람 있는 삶의 길을 찾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다. 새벽 5시에 기상예배를 드리고 봉화산 능선 산책, 가사일, 아내가 기르던 화분에 물주기 등 집안일도 여자 못지않게 잘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앙이 침체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생각에 지금은 아내가 하던 주일학교 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다.

 

白手의 하루 글 : 권 치 남

 

봄에는배꽃피고 여름엔숲속되고

가을는배밭되고 겨울엔눈산되고

봄에는배꽃구경 여름엔그늘구경

가을는단풍구경 겨울엔설경구경

 

봄여름가을겨울 사개절새벽산길

능선따라오르니 봉화산정상이라

건강하게살고파 성인병예방운동

길따라하산하니 오늘도반이되네

 

샤워하고밥먹고 누어서생각하니

어느새잠이들고 눈을뜨니갈시간

허둥지둥옷입고 허둥지둥책가방

집안을돌아보고 집을나서니세상

월요일은학교에 화요일은을지로

수요일도을지로 목요일은광화문

금요일은수유리 토요일은자택에

일요일은구의동 월화수목금토일

 

하는공부많다만 나홀로하루하루

희망없는글공부 힘이없는글공부

내가무었이될까 내가무었을할까

희망찬오늘이면 희망찬내일이면

 

 

봉화산 능선 길

 

비가 오나 눈이오나 나의 새벽 산책로 봉화산 능선 길

서울 동북부 지역에 위치한 봉화산 봉수대는 1993121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 되었다. 이 봉수대는 해발 131m의 봉화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면적은 4,060이다. 비록 해발 고도는 낮지만 주위에 높은 산들이 가로막지 않아서 사방이 탁트인 지세로 남산의 봉수와 양주의 한이산 봉수를 일망무제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아차산 봉수대가 종전에는 광진구 광장동 소재 아차산성에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산 46-1번지 일대 봉화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정도 600주년을 맞이하여 철저한 고증을 거쳐 중랑구 묵동 산 46-1번지, 신내동 산 139번지, 상봉동 산 6번지, 중화동 산 1번지 등에 연면적 4,060을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하고 있다. 현재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는 1994117일 새로 복원되어 대리석으로 설치 되여졌다. 옛날의 아차산 봉수는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남산 제1의 봉수로 연결되는 제1봉수의 말단으로 양주의 한이산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목멱산) 1의 봉수로 전달해 주던 곳이다. 현재 봉수대는 다른 곳에서 현존하는 봉수대의 형태와 조선 보물고적 조사자료 등의 기록을 참고로 19942월부터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동년117일 상부연대 11.62m 연조1기의 규모로 복원하였다. 봉수란 봉(횃불) 과 화(연기)로 국경의 긴급한 소식을 중앙이나 국경의 기지에 전하던 군사통신방법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용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봉수제가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본격적인 국가제도로 확립된 것은 고려시대부터 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봉수제를 이어받아 세종때는 좀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봉수제가 확립되어 전국적인 봉수망이 정비되었으나 1894(고종31)에 이르러 폐지되였다. 봉화산 봉수대는 또 경상남도 기념물 제157호로 1997130일 지정 되여 있다. 이 봉수대는 경남 무학산 줄기인 해발 265m의 봉화산에 위치하고 있는 봉수대로서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 등 위급상황을 중앙에 알리는 신호수단으로 쓰인 것이라 추정된다. 북한에도 봉화산이 있다. 우리나라의 봉수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58호로 광제산 봉수대는 남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하여 그 정세를 중앙에 전달하는 중요한 통신 수단이다. 강망산 봉수대는 경상남도 기념물 202호로 지정되고 기장 이길 봉수대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8호로지정, 서생포 방면의 군사정보를 중앙으로 알리는 옛 통신시설이다. 양산 이길 봉수대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38호로 지정되고 사천 우산 봉수대는 경상남도 기념물제1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런 봉수대는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 봉우리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올려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나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할 때 사용하는 통신시설이다.

봉화는 밤에 피우는 횃불만을 가리키는 말이 였으나 조선시대에는 낮에 올리는 연기까지도 포함해서 흔히 봉화라 통칭 하였으므로 봉수대의 이름도 봉화의 ()자를 따서 여러 가지로 불렸다고 한다. 봉수제도가 삼국시대를 거쳐서 고려 의종때 확립 되였음으로 봉수대의 시설도 그 때 확충 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422(세종4)에 각도의 봉수대의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1438(세종20)에 완비하였는데 연해나 변방에 설치된 봉수에는 목수가 쓰는 자(영조척)로 높이25, 둘레70척의 봉수대를 쌓고 그 아래에 깊이, 넓이 각 10척의 방공호를 팠다. 봉수대 위에는 임시로 집을 지어 각종병기와 생활용품을 준비해 놓게 하고 봉수군(봉화군.봉졸.봉군)과 봉수군을 통솔하고 감시하는 오장(오원)이 생활하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는 목멱산(남산) 봉수대(경 봉수대)사이에 설치된 내지 봉수에는 연기를 올리는 봉수대는 쌓지 않고 아궁이(연조)만 쌓았으나 적이 침범하기 쉬운 곳은 봉수대를 쌓고 맹수의 습격을 막기 위해 둘레에 담을 쌓은 곳도 있었다.

1474(성종5)에는 모든 봉수대의 아궁이 위에는 반드시 연통을 높이 달아서 낮에 올리는 연기가 바람에 흩어지지 않고 잘 보일수 있게 하였다. 각 봉수대에 배속된 인원은 서울 목멱산(남산) 봉수대에 봉수군 4, 오원(오장)2, 연변 봉수대에는 봉수군 10, 오장2, 내지 봉수대에는 봉수군6, 오장2명을 배속하고 각 봉수대의 정원을 상하양번으로 갈라서 교대 근무하였다. 지금 같으면 고지의 주요통신시설을 24시간 근무조 편성과 같다고 하겠다. 조선전기에는 전국에 650여개의 봉수가 있었고 봉화는 전황에 따라 5번까지 올리는 5구분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각 봉수마다 봉수대 5기가 있었다. 전국의 봉수는 경흥, 동래, 강계, 의주 순천의 5개 봉수대 기점으로 하여 서울목멱산(남산)의 제1봉에서 제5봉의 봉수대로 집결되는데 제1봉의 봉수대는 함경강원도에서 오는 봉수를 양주 아차산 봉수대로부터 제2봉수대는 경상도에서 오는 봉수를 광주 천림산 봉수대로부터 제3봉수대는 평안.황해도에서 오는 봉수를 무악산 동봉의 봉수대로부터 제4봉수대는 평안 황해도의 해안에서 오는 봉수를 무악산 서봉의 봉수대로부터, 5봉 봉수대는 전라 충청도에서 오는 봉수를 양천(서울양천구)개화산 봉수대로부터 각기 받았다. 이와 같이 전국에서 올라온 봉수의 정보는 목멱산(남산) 봉수대의 오원이 병조에 종합해서 보고하면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1894(고종31) 봉수제도가 전화통신체제로 바뀌어 폐지 되였는데 현재 남아있는 봉수대에는 지방 기념물로 지정하여 각도. 시에서 보호하고있다.서울기념물제15호 아차산 봉수대는 중랑구 묵동산, 신내동산, 상봉동산, 중화동산 4개동 위치 봉화산 정상에 있다. 봉화산 봉수대를 향하는 교통편은 여러 길이 있으나 지하철 6호선 종점 봉화산역을 이용하면 편하게 가볼수 있다. 지하철 6호선을 타고 봉화산역에서 내려서 4번 출구로 나오면 신내 우체국이 있고 맞은편에는 신내동 5단지 상가가 보인다. 우체국 앞에서 신호등을 건너 봉화산을 쳐다보고 올라가면 금성초등학교 정문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우측에는 영암교회 십자가 탑이 높이 있고 그 옆은 중랑 도서관과 체육센터가 있으며 맞은편에는 그린공원이 봉화산 깊숙이 까지 깨끗한 놀이시설을 감싸고있다. 그린공원 주변은 산 중간까지 배나무 밭이여서 출입이 금지 되여 있어 봉화산 정상 봉수대를 오를 수는 없다. 공원을 한바퀴 돌아 다시 정문으로 나오면 금성 초등학교 담을 따라가면 운동장이 있고 후문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공원과 봉화산이 한눈에 보이는데 봄에는 배꽃이 만발하여 고려 충혜왕(28) 충신 이조년(1269-1343)의 시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배꽃에 대한 시가 읊어진다. 이 시는 시인이 봉화산을 끼고 묵동으로 가는 소로를 따라 펼쳐진 배꽃 길을 거닐면서 야인으로서 울적한 심정을 담아 읊은 시라고 한다. 배꽃은 공원과 온 산이 눈 덮인 눈 산이 되고 가을에는 온 산이 과수원이 되여 군대군대 싸놓은 배는 동산을 만들고 단풍도 설악산 오색 약수터 못지 않다.

겨울이 되면 배나무는 배꽃과 배를 다 잃어 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눈비에 시달리고 있다가 여름이 오면 숲을 만들어 주변을 시원하게 하고 공원 분위기를 다시 조성해 준다. 금성초등학교 후문에서 봉화산 그린공원 4계절 풍경을 생각하면서 조금만 더 가면 급경사진 산책로가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오르기는 쉬우나 매일 산책을 하지 않은 사람은 단숨에 오르기 힘들고 한번 정도 쉬어 올라야 한다. 겨울에 눈이나 비가 와서 빙판이 될 때에는 아이쨍을 하고도 철조망을 붙들고 철조망에 매달려서 올라가야 한다. 거기만 오르면 산등성이고 봉수대 오르는 방향 표시가 있어 소나무 사이로 오르면 평지에 운동기구와 배드민턴장이 있고 봉화산 정상을 쳐다보면 높은 위치에 무선 아테나가 첨단통신시설을 자랑하며 서 있다. 안테나를 보고 오르면 급경사다. 거기도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오르기는 쉬우나 노약자는 의자에서 쉬었다가 오르면 된다. 산은 그렇게 높지 않아도 산세는 설악산 오색 약수터 골짝이의 축소판이다. 정상에 오르면 아차산 봉수대지 간판에 봉수대에 대해 설명해 놓고 있다.

 

(1) 약산교10회지 201149일 토

 

조약도는 나의 촐생지

 

새벽닭이 울 무렵 나는 섬 조약도에서 아버지 권호근 과 어머니 양옥심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삼재라 불렸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지만 머리가 좋아 위로 두 형들의 이름을 돌림자도 아인데 끝 자를 재자로 지으셨으니 셋째 나를 편하게 삼재라 지어 부른 것 같다. 그런데 우체국에 근무하시던 유식한 이모부께서 삼재는 일본사람 이름 같고 천, , , 을 삼재라 하기 때문에 사람 이름이 너무 좋아도 팔자가 나쁘니 치남이로 다시 지어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지금도 고향 분들은 나를 삼재라 부른다. 나의 어머니는 태몽이 좋았고 띠와 시가 좋은 때 태어나서 성격이 온순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면서 좋아 하셨다고 한다.

셋째 득남을 기뻐하신 어머니는 아들을 연속 셋을 낳고 보니 남존여비 사상이 남 보다 강하신 아버님께 여자로서 자신감이 생기셨기 때문인것 같다. 그리고 가정일을 타합하지 않고 혼자서 처리하신 아버지 성격에 여자로서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만삭된 아내를 나몰라라하고 밤새워 투전(화투)만 하고 다니시고 내가 태어난 순간에도 투전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득남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아 투전이 잘되어 그 날 밤 많은 돈을 땄다고 한다. 그 후 부터는 그 돈으로 집안을 돌보고 일도 열심히 하셨다고 어머니는 이야기 하셨다.

이렇게 서러움을 받고 태어나서 자랐고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걸음을 간신히 걷기 시작할 때 우리집 부엌의 바닥이 흙이여서 울퉁불퉁한 그 위를 아버지의 게다를 끌고 부엌으로 어머니를 찾아가는데 뒤에서 형이 게다 뒤끝을 밟아 앞으로 넘어져 이마를 많이 다쳐 상처가 생겼다. 그때 상처 부위에 된장을 바르고 나았다. 지금도 이마 중앙에 흉터가 있다.나의 삶 나의 글

 

일제때 최남단 섬 조약도에서도 노름(도박)이 심했다고 한다. 간섭도 하지 않았고 화투를 일본 놈들이 보급해 한국사람들의 정신을 방탕하게 했다고들 한다. 왜정때 나서 자라고 해방이 되기 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어를 좀 배우다가 해방이 되어 한글을 배우다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일본어도 한국어도 배운척 만척하다 초등학교 입학을 했기 때문에 일본어를 모른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우리 집은 아버지가 노름도 않고 농사일을 열심히 하여 논밭을 장만했기 때문에 할 일이 너무 많아져서 가족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농사일 이였다. 그렇다고 머슴을 놓고 살 형편도 아니었다. 많은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형들이나 나는 아버지의 일을 돕지 않으면 감당할 수가 없었고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에 얻어맞기 일수 였으며 학교는 다녔지만 공부는 뒷전이고 힘든 일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도 곡식은 매상하고 감자로 끼니를 때우면서 일을 했다. 학교에 갔다오면 집에 오래 지체하지 못하고 감자를 김치에 싸서 먹은둥 마는둥 하고 산이나 논밭으로 나가야 아버지는 좋아 하셨다.

우리 집에서는 공부보다는 일의 비중이 더 켰다. 이렇게 아버님께서 근면하시고 자수성가로 가난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때쯤 큰형은 부산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우리집은 인민군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목받았고 큰형은 부산에서 대학을 입학했는데 미군잡지 배달 아르바이트하고 남은 책들과 교련 책이 집에 있었는데 그 책들이 발견되면 연행되어 갈것이 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혜를 발휘하여 교련 책과 미군잡지를 거름덩이 속에 깊숙이 파묻고 형은 소막사 위에 싸놓은 짚덩이 속에 방을 만들어 피신시켜 밥을 넣어주고 앞에는 짚단으로 가려서 아무도 모르게 은신시켜 주위사람들의 눈을 피하게 하였다. 그렇지 않은 면장 자식이나 부잣집 자식들은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연행해 바다에다 두손을 뒤로 꽁꽁 묶어 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렸다. 돌멩이를 몸에 메는 까닭은 바다에서

 

헤엄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시체도 육지로 못 밀려가서 바다에 가라않게 하기 때문이 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체들이 조약도 바닷가 마을로 밀려왔다는 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나서 섬에서는 청년들과 학생들이 편을 나누어 전쟁과 같은 싸움을 심하게 했다.

동네 어른들은 싸움이 너무 심하더니 낙도까지 인민군이 들어오고 온 동네가 전쟁터로 변했다고 수군거렸다. 싸움도 육박전이였고 던진 돌멩이는 총알 같이 나르고 깡통 속에 솜을 넣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쳐서 상대방에게 던졌다. 지금 같으면 데모대의 화염병과 유사했다. 또한 이웃동네 학생들이 학교에 가는 길을 통과시키지 않고 먼 산길로 돌아가게 하고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의 괴롭힘으로 학교를 가지 못 하기도 했다. 그때 학교운동장에서 1년에 한 두번씩 활동사진 영화가 들어왔는데 여학생들은 짓궂은 남학생들 때문에 구경 다니지도 못했다.

6.25전쟁은 마을 청년들의 패싸움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 집은 지대가 높아 경찰과 인민군이 교전상황을 다 볼수 있었다. 육지에서 사격한 포탄은 섬에까지 날아와 힘없이 털어지고 동네 분들의 육성으로 이여 지어 전달된 경찰의 통신망도 이미 끊어지고 모두들 산으로 피신했는데 산 위에서 경찰은 실탄을 운반해 달라고 아우성 이였다. 그때는 면사무소나 지서는 이미 인민군이 점령했고 앞산 정상에는 인민군 선발대 1개 분대 숫자가 이 나무 저 나무 이숲 저숲에 숨어서는 기어서 돌격하여 인민군 깃발을 꽂으려고 엄호 속에 쏜살같이 올라와 깃발을 꽂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전투 모나 전투복이 숲에서 노출을 방지하는 것도 알았다. 앞산 정상은 인민군이 점령하고 인민군의 깃발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뒷산에 있는 경찰들은 연락망이 끊겨 별수 없이 제주도방향으로 배를 타고 이웃 면으로 후퇴하고 있다. 미리 후퇴하지 못한 경찰들은 인민군에게 포위되어 오도 가도 못하고 도간에 든 쥐가 된 상황이 되어 어쩔 줄 모르고 수수밭 속에서 총과 경찰복을 버리고 농사꾼 복장으로 갈아입고는 은신하기도 하고 바닷가에서 포위된 경찰은 총을 들고 바다 물이 들어오는데도 바다 속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가고 인민군의 자수하라는 소리 치며 총을 쏘아도 경찰들은 끝까지 총을 버리지 않고 바다로 계속 들어간다.

어차피 죽을 몸이지만 바다 속에서 죽지 인민군 총에는 죽지 않겠다는 생각이 였던 것 같다.

해는 서산에 걸려있고 경찰들은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가을 햇살은 유난히 붉게 비추고 저해가 지면 경찰관의 운명도 같이 끝나겠다 생각하니 어린 내 마음도 슬퍼졌다. 밤이 지나 아침이 되니 몇 번의 파도는 시체를 씻어 갔는지 벌 밭위에 총을 든 채 쓰러져 있는 경찰들을 동네 분들은 끌어내고 있었다.

백호가 넘는 시골의 큰 동네는 인민군이 점령했고 인민위원회 청년과 여성동맹위원회가 조직되어 부잣집이나 상급학교에 다니는 자식을 둔 가족들을 괴롭혔다. 마을사람들은 세상이 바꿔지니 마을 분위기가 완전히 바꿔졌다고 수군거렸다. 서로 감시하며 부잣집의 물건들을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듯 가져갔다. 그러나 인민군이 후퇴한 후로는 다시 물건을 원상태로 갖다 놓기는 했지만 인민군에 동조하여 주민을 심하게 괴롭혔던 사람들은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작은 섬 작근 마을 주민들은 서로 형제들 같이 살아왔는데 몇 일 사이에 서로 원수가 되었다.

자식을 잃은 유학생 부모는 자식의 친구들이나 상급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을 보면 내 자식 어디 갔느냐 하며 눈물이 끊길 줄 모르고 통곡하니 살아남은 학생들도 괴롭고 힘든 일이 였다.

그 부모들을 만나기가 겁이 났을 것이다. 우리 집도 아버지의 지혜로 큰형은 희생되지 않았지만 큰형이 상급학교 학생이었고 아버지가 자수성가하여 부자란 말을 들였기 때문에 인민군과 협조한 주민들은 쌀이 가득한 독과 소에 차압을 붙쳐 놓고 승낙 없이는 사용하지도 먹지도 못하게 하였다. 인민군은 미군 인천 상륙작전으로 육지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제주도 방향으로 후퇴했던 경찰들은 다시 태극기를 앞세우고 애국가을 부르며 우리 집 앞길로 지나 지서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숨은 주민들에게 우리는 인민군이 아닙니다. 우리 경찰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주민을 보고 손을 흔드니 숨어있던 주민들도 나와서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관과 태극기를 보고 심통해 하던 주민들도 많았던 것 같다. 며칠 사이로 동네는 음지가 양지로 양지가 음지로 변한 것이다.

음과 양이 바꿔졌던 불편한 상태는 계속된 것이다. 이제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서울은 다시 부산에 있던 정부가 서울로 올라가고 형이 다이던 서울대학교도 부산에서 정부와 함께 서울로 옮겨감으로 형도 서울로 가게 되었다. 우리 집은 형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농사일을 하고 인민군에게 차압 되였던 소를 마량장에 끌 고가서 팔아 학비를 마련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집은 부산에 연고 얻는데 서울로 바꿔진 것이다. 우리 집은 부자라고 했지만 형의 계속된 학비조달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실정이 되었고 둘째형도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나도 또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상급학교의 진학을 포기했다가 나의 배워보겠다는 의지하나로 늦게나마 상급하교에 진학했다.

조약도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일제치하로부터 해방과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섬에서 맞았고 빈가에서 부자라는 가정을 이루는 아버지를 도우며 살아온 내가 체계적으로 공부만 했던 것보다 살아가는데 좋은 경험이 되고 있다. 조약도 섬은 농사만 짓는 농촌이 아니라 어촌이 되다보니 집안 일 들이 다양하고 농사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겨울에 김(해태)을 추운 엄동설한에 등잔 불빛 밑에서 온 식구가 혼연 일체가 되여 한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김을 생산하여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에 주민들은 매년 추석이 지나기가 무섭게 대나무와 말장을 준비하여 배에 실어다가 말장을 뻘에 꼬고 거기다가 대나무를 가늘게 쪽에서 새끼를 엮어 혼자서는 들지도 못할 정도로 크게 만들어서 말장을 세워 놓은 바다에 펴서 떠내려가지 못하게 총총히 매달아 놓으면 밀물썰물 바다 물이 왔다갔다하는 동안 바다 속에 잠긴 대나무에 김의 씨가 묻어서 자라면 찬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에 배를 타고 바다에서 김을 채취해 오면 저녁에 잠을 설쳐가며 파래를 등잔 밑에서 골라내 새벽녘에 김을 칼이나 기계로 잘게 조사서 물가로 가지고 가서 짠물을 시쳐내고 정해진 규격에 물과 혼합된 김을 부어서 기술적으로 발장에 나열하고 한장 한장 많은 장수를 만들어 쌓아 놓으면 아침을 먹고 온 식구들은 건장(김을 말리는 곳)에다 한장 한장씩 펴서 해가 뜨기 전에 널어놓고 마르면 한장 한장 다시 거둬 다가 집이나 건장 앞에서 김과 발장를 분리 정리하고 저녁이 되면 또 바다에서 뜨더(체취)온 김을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밤이 깊도록 잠도 자지 않고 새우 눈으로 김과 파래(청태)를 구별하는 작업이 한겨울 동안 반복된다. 그렇게 만든 김은 규격에 맞게 정리하여 규격 종이 띠로 100장을 한속으로 묽어서 잘 정리하여 꾀짝에 보관해 놓았다가 검사날이오면 판정을 받아 등급에 따라서 돈을 받아온다. 날씨가 좋아서 김 품질이 좋아 판정을 잘 받으면 적은 량으로도 많은 돈을 받아오게 되고 그 날은 집안분위기가 좋아져서 고생했던 일을 다 잃어버리지만 그렇지 않은 날의 집안분위기는 온 식구가 우울하고 아버지의 눈치만 보게된다.

이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하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진질(바다에서 자란 풀)을 배로 채취하여 산더미 만하게 실어다가 싸아놓고 썩혀서 그 것으로 농사 퇴비로 사용하는데 그 일은 더욱더 힘이 든다. 또한 바다고기를 잡아다가 반찬도 하고 많이 잡을 때는 즉석에서 팔아서 돈을 만들기도 하고 맛있는 귀한고기는 손질해서 잘 말려 보관했다가 제사나 명절 때 손님이 오면 상에 오른다. 이렇게 농촌과 달리 할 일도 많았지만 김을 일본으로 수출했기 때문에 주민소득은 보통 많은 것이 아니였다. 근면하고 자식들이 많은 집은 한겨울 지나면 집안이 여유가 생기고 자식들도 상급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겨울 한때는 오백원짜리 지폐를 동네 개들도 물고 다닌다고들 했으니 정신이 바로된 사람은 자식들 공부시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재산을 모으거나 어렵게 온 식구가 모아놓은 돈을 술이나 노름으로 허비하였다. 조약도는 지금 행정구역이 완도군 약산면이다. 좁은 섬치고는 높은 산이 많다. 그때는 산이나 바다는 공동 소유로 누구나 부지런하면 먼저 점유하여 한해를 잘버러 먹을수 있었다. 산과 바다 중에도 목이 좋은 데가 있다.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주민들간에 싸움도 있고 그런 감정으로 집안간 원수같이 살아온 사람들도 있어고 빈부의 격차는 커지고 지주와 소작인이 생기고 친일파 권력을 등에 엎고 있는 집안은 지주가 되고 예나 지금이나 배우지 못하고 힘없는 집는 소작인으로 항상 지주 집에 가서 일해주고 종노릇을 하면서 힘든 일을 해서 연명해 왔다.

조약도는 산이 좋아 목축업도 많이 했다. 산을 소유한 집도 있으나 대게는 목축을 기르지는 않고 공동 산으로 집집마다 소나 염소 몇 마리씩 길렷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서 오면 곧바로 지게를 지고 뒷산 높은 곳에 가서 아침에 내다놓은 소3마리와 염소2마리를 끌고 지게에는 풀을 잔뜩 지고 경사진 산을 내려오면 얌전한 소는 길을 따라서 집으로 오지만 촐랑대는 염소는 짐을 진 내 아래 다리와 지게 두 발목 네다리를 고삐로 휘어 감아 넘어뜨리고는 남에 논밭의 곡식을 먹으면 주인은 마을에서 쳐다보고는 소리소리 지르면서 욕설을 했다. 나는 급하게 일어나 지개풀을 다시 정리해 지고 소 염소를 다시 끌고 올 때는 정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죽고싶고 양다리가 불구인 놀고먹는 동네친구가 부러울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초등학교시절에 많은 일로 고생하면서도 상급학교에 가고자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공부도 하고싶고 남과 같은 중학교 교복도 그리웠고 방학때 동창생들이 고향에 내려와 뽐내고 일도 하지 않고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볼 때면 정말 부러웠다. 집안 일을 피해 어디로든지 집을 떠나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그때는 초등학교에 임시로 공민학교라고 해서 비인가 중학교과정이 있었다.

그곳을 아버지 몰래 입학했고 일 때문에 중학을 보내지 못한 아버지도 승낙하여 일 년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강진 큰댁과 이모님이 살고계신 중학교에 편입시험을 보아 2학년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육지에서 중학생활.

 

나는 이제 집을 떠나 섬 조약도에서 육지 정규중학생이 되였고 그렇게 소원 이였던 교복을 입고 방학이 되면 부모님을 찾아 고향에 갔다. 방학 때는 아버지가 좋아하신 술 한병과 과자(사탕) 한 봉지를 사 가지고 부모님께 무릎 꿇고 큰절을 올린 기억이 생각난다. 그러면 아버지는 술을 이웃 어르신들과 나누어 마시고 어머니는 사탕을 좀 감추어놓았다가 우리중학생 아들이 방학을 해서 집에 오면서 사왔다면서 자랑하셨다. 이제 나는 섬 조약도에서 육지 상급학교 학생이 되였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초등학교 때 육체적 고생이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때는 부모 밑에서 먹고 자는 것은 걱정 없었으나 이모 집에 엊쳐 살기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진에는 큰댁과 사촌누나 두분 그리고 이모 등 여러 친척이 있었으나 어머니의 살붙이라고 이모 집에 있게 했는데 이모부가 돌라 가시고 서른 셋에 혼자되어 섬에서 과수원과 농사를 어린 자식들과 해나갈수 없어서 육지로 이사와서 점방이라도 해서 자식들과 먹고살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집안이 기울어져 가는 때라 어렵고 자식들과 먹고사는 것조차 힘들고 나중에는 자식들의 공부도 중단시키었다. 이모가 섬에서 이사한 이유는 이모부가 우체국에 다니시다가 폐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이모부 친구가 과수원과 농사를 도와준다면서 간혹 찾아와서 도운 척 하더니 결국 서른셋 과부를 그대로 두지 않아 임신을 시켜 아들을 낳았는데 시골에서 창피해서 살 수 없어서 아들 둘과 시어머니 그리고 어린애를 데리고 시골의 유지 집이 폐가망신으로 그 좋은 살림을 처분해 가지고 이사하게 된 것이다. 강진에 이사와서도 과부가 홀로된 시어머니와 어린아이들까지 다섯 식구가 살아가기 힘든 상태에서 나까지 있어서 생활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집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맡겨 놓았고 동생 고생한다고 식량은 넉넉히 보내도 나는 항시 배를 채우지 못해서 불만 이였다. 내가 먹을 식량을 보내도 기울어져 가는 가정에 보낸 식량은 밑빠진 독에 물 붙기가 되고 말았다. 방도 모자라서 노하신 사돈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잠도 자보고 후에는 노쇄 하시여 거동이 불편하여 소대변을 받어내기도 하여 그 방에 있지 못하고 이웃에 살고있는 사촌누나집에서 사돈어른과 낮에도 불을 켜야 책을 볼 수 있는 골목 방에서 살면서 학교에 다니다가 도저히 불편하여 살수 없어 혼자 방을 얻어 자취를 하는데 식량과 반찬은 집에서 가져다 먹을 수 있었지만 밥을 할 나무가 없어서 산에 가서 갈키를 가지고 낙엽 솔잎을 긁어모아 가져와서 밥도 해먹고 방에 불도 넣어 겨울을 보냈다.

이 뿐만 아니라 집에서는 납부금을 기한 내 보내지 않아 수업을 받지 못하고 수업시간에 쫓겨온 적이 한 두번이 아니였고 납부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는 집으로 보내고 집에서는 돈이 없다고 공부 그만두고 농사일이나 하라는 아버지 호통에 울기도 많이 하며 어떻게 중학교를 갔는데 그만두라고 하는지 부모자식간에도 섭섭함이 많았고 원망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 여동생을 여자가 공부하는 것 보다 시집가서 살림 잘하고 애낳고 살면 된다고 하나도 가르치지 안했다.

유교사상이 유난히 강하셨다. 둘째형이 큰형과 동생 때문에 희생한 것을 보면 나는 부모님의 배려에 감사 했어야했다. 섬 조약도에서는 겨울 한때는 김을 생산해서 오백환짜리 지폐를 개가 물고다닐 정도로 돈이 흔하지만 그 외에는 돈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보다 힘든 곳이고 많은 돈을 빌릴 때에는 전답을 잡고 꾸어주기도 했다. 큰형은 서울에서 나는 강진에서 돈을 가져가니 자식들 공부 가르치는 보람으로 느낀 부모지만 집안살림하고 상급학교 보내지 못한 둘째형과 어린 동생들을 생각할 때 돈이 물 솟듯 솟아도 힘들다고 자식 많은 것도 다 필요 없고 무자식 상팔자라고 칠 남매를 둔 아버지는 간혹 한숨을 쉬시며 불평도 많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상급학교 다니는 자식이 납부금 내지 못하고 육지에서 섬의 집에까지 와서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어머니만 졸라대는 머리큰 자식을 때리지도 못하고 이집 저집 생활비를 어머님께 꾸어오게 하여 그것도 납부금 반 생활비 반으로 쫓아서 보내곤 했다.

 

아버지는 돈이 없어 그런지 절약하기 위함인지 요구한 액수에 전액을 주지 않고 모자라게 주기 때문에 항시 생활하기가 힘들고 방학을 맞이하여 집에 가기까지는 생활에 고통을 받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쌀독 깊숙이 감추어 놓은 돈을 아버지 몰래 간혹 보충해 주기도 하셨다. 학교에 도시락을 가져가야 하는데 그냥 가서 다른 학생은 즐거운 점심시간이라고 오전수업이 끝나자마자 삼삼오오 둘러서 밥을 먹지만 나는 혼자 운동장가 나무 밑에 앉아 있다가 식사가 끝나면 교실에 들어가면 어디 같다 오느냐고 물어보면 점방에서 빵 사먹고 온다고 거짓말도 많이 하고 굶기도 많이 했다. 그때도 왕따와 지역차별이 있었다.

타군이 고향이고 섬이라고 괄시하는 학생도 있었고 지금은 돈 많은 애들이 왕따가 된다는데 그때는 돈 없다고 모임에 끼워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렇게 강진에서 4-5년간을 중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게 된 것도 고향에서 힘든 일로 이곳에서 죽으면 죽어도 다시는 고향집에 가서 어촌 일은 하지 않으라고 결심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아버님께 힘든 일을 배우지 않고 귀엽게 자랐으면 몇 번이고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고 집에서 잠자리, 먹을 것 걱정 없이 부모님 밑에서 생활했을 것이다. 그때는 강진이 영암, 해남, 장흥, 완도 5개군 중심지고 고등학교도 한곳 분 이여서 큰 도시로 유학하지 않은 사람은 거이다 이 학교에 다렸다. 강진에서 서울로

 

나는 이제 강진 동성리 동문에서 어렵게 자취생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큰형이 서울에서 결혼하여 살고있기 때문에 서울로 학교를 왔다. 아버지도 이젠 고향온 것을 반대하시고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으니 서울가서 형과상이 하라고 밀어 붙쳤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는 속담까지 하시면서 서울에 계신 형에게 맡기려는 생각 이였다. 나도 고3때는 서울 좋은 대학가서 공부하고 싶어서 막무간에 서울대 상대학장님이 같은 일가라 무작정 편지로 나도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더니 학장님께서 답장이 왔는데 잘해보시오 라는 간단한 내용 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고싶은 마음이나 고3때 대학가고 싶은 심정이나 똑같았다. 그때 모두 대학을 서울까지는 생각지도 못했으나 나는 형이 있어 별수 없이 서울로 지원하게 된 것이다. 이제 다산 정양용 선생께서 귀양살이했던 강진 동성리 동문을 떠나 고향집 조약도에서 며칠간 쉬다가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 부모님이 싸주시는 보따리를 들고 집을 출발한 시간은 이른 아침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 천동 부두에 마량가는 배를 타기 위에 떠난 것이다.

부두에 도착하여 조금 기다리니 여객선은 기적소리를 내며 부두에 기다리는 손님들을 실꼬 출발을 알리는 배 고둥소리는 그리운 고향 조약도를 뒤에 두고 바다를 힘차게 가르며 한바퀴 돌고는 마량을 행해서 출발했다. 멀어져가는 조약도 산이 갈수록 멀리 보이고 육지는 크게 보였다. 이곳이 이순신 장군께서 왜적을 물리치신 곳이라 바다물살이 세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배는 요동을 친다. 조금가면 내릴 준비가 시작되고 방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고 짐을 챙겨서 배 입구로 정열해 놓고 서있다.

배가 부두에 도착하면 강진 가는 버스를 먼저 타야 좌석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배가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은 가지고온 짐보따리를 이고, 지고, 들고 남녀노소 없이 버스를 행해서 경주를 하는 것처럼 힘을 다하여 달려간다. 이때는 부두가 온통 인정사정 보지 않고 우왕좌왕 수라장으로 변한다. 그러다 보면 어떨 때는 물에 빠진 사람, 짐을 빠뜨린 사람들도 간혹 생긴다. 재수가 좋아 사람이 많지 않거나 짐이 간편하면 자리를 잡고 편안히 고려청자가 발굴된 대구를 지나 칠량을 통과하면 군 동면에 큰댁이 있고 뒷산에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묘가 있다.

버스 창밖으로 잠깐 이나마 조상을 생각하다보면 차는 내가 다니던 학교 앞을 지나 강진읍 정류장에 들어선다. 여기서 또 한번 광주행 버스를 옮겨 타야 한다. 여기서는 아예 자리를 잡을 생각을 말아야한다. 출발지 버스가 아니고 타군에서 출발하는 경유버스라 이미 버스는 만원이 되어 있거나 아직 도착하지 않아 손님들은 줄을 서서 기다린다. 만원버스는 차장의 오라이 소리로 출발하고 버스는 비포장 길을 안개처럼 먼지를 내면서 영산포, 나주를 경유하여 광주로 향한다. 그런데 기차로 서울간 섬사람은 목포발 서울행 완행 밤열차를 이곳 영산포 기차역에서 타기 위해 정류장에 하차하여 기차역까지 긴 다리를 짐을 이고, 지고, 들고 피난간 사람들 저럼 줄을 지어 걸어간다. 짐에 따라 멀기도 하고 가깝기 도한 다리지만 나는 한번도 가깝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지겹게만 느끼던 다리이다.

광주 가는 버스가 영산포 정류장에서 기차역으로 경유해서 내려주면 좋으련만 그때는 버스가 정류장에서 광주로 직행했다. 영산포 기차역에 도착한 사람들은 집에서 싸가지고온 김밥이나 감자 또는 삶은 계란을 꺼내서 각자 시장한 배를 채우고 기차역 대합실 나무의자에 누거나 앉아서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호남선 밤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상경하게 된다.

기차에서도 완행열차는 자리잡기는 힘들고 재수 좋날은 의자를 기대고 서있을수 있거나 마음씨 고운 옆사람을 만나면 의자 팔걸이에 엉덩이 반쪽만대고 앉아 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밤새도록 서있거나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도 있지만 나이 드신 아즘아들이고 고등학교를 갓나온 나는 체면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서있을수 밖에는 없었다.

주변에 여학생이나 있으면 내몸은 안절부절 경직되고 힘이 들어도 서 있었다. 어떤 얌체족들은 짐올려 놓은 자리로 올라가서 팔자 좋게 두다리 펴고 잠을 자다 밑으로 굴러떠러 지기도 한다. 열차는 대전 역에서 국수를 먹을 시간을 주지만 나는 집에서 싸준 계란으로 대신한다. 좁은 통로에 서있으면 이동 주보와 역마다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사라고 하며 좁은 통로를 누비는 잡상인들이 밉고 지나갈 때마다 짜증이 났다. 천안 역에서는 호두과자를 사라는 소리에 새벽잠을 깨지만 구수한 천안사람 목소리는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호남선 열차 속에서 전라도 말소리는 대전국수를 먹은 후부터는 변질이 되어가고 천안역 호두과자 장사들의 소리는 서울역이 가까움을 알려주고 전라도사람 말소리는 변화하기 시작하여 말끝에 요자가 간혹 오르내린다. 말끝에 요자를 사용한 것은 서울사람들 말이기 때문에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사람임을 숨기려는 뜻도 있었다. 서울역에 기차가 플랫홈에 들어서기도 전에 사람들은 짐을 내리느라 분주해진다. 영등포, 용산, 서울역까지는 기차 안이 더욱 비좁아 진다. 내리는 사람들도 많지만 짐을 들고 통로를 왔다갔다하니 더좁아진다. 서울역을 내리면 전날 집에서 출발시간인 아침시간이 거이 되고 서울역앞 지게꾼은 짐든 손님 곁에 서성대면서 운반을 청한다. 그때 시골에서는 서울가면 눈빼가고 눈감으면 귀 비여 간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나는 어느 정도 무거운 짐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사람은 나면 서울보내라는 아버님 말씀이 생각난다. 처음 서울에서 제일 갈등이 생긴 것은 동서남북 갈 길을 모르고 전라도 사투리는 내 입을 막고 벙어리를 만들었다.

지금은 교통이 좋아 전라도 말이나 전국 어디 말이나 그렇게 차이가 없으나 그때는 전라도 말은 뚜렷하고 어디서나 싫어하는 말이었다. 더욱이 지역감정이 극해 달했고 전라도사람은 싫어할 때였기 때문에 더욱 나에게는 갈등을 느끼고 반벙어리 생활을 했는지도 모른다. 1차 안암동 소재 대학을 시골에서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주재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2차로 왕십리소재 대학에 합격연락을 받고 59학번으로 입학했다.

 

(2)약산교제10회지2011618일 토

서울에서 대학생활

 

대학시절에 4.19의거 와 5.16군사혁명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학보로 군복무를 마치고 65년도에 그리던 대학졸업장을 받았다. 59년도 입학해서는 서울시내 고등학교 졸업생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학교를 다니면서 기압도 받고 괄시도 받았다. 그러나 묵묵히 대학생활이라기 보다 고등학생같이 열심히 공부하고 강의에 충실했다. 내 전공과는 독일어학점을 잘 받아야하기 때문에 고등학교때 배우지 않은 과목이라 종로학원에서 보충 강의를 받았다. 학기가 시작하면서 시위는 연일 계속하고 고학년 선배들의 행동은 거칠어지고 학생들은 공부보다 데모대 속에서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했는데 구호가 어용교수추방, 등록금 인하에서 총장 물러가라는 시위구호였다.

그때 왕십리 소재대학은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많은 청강생을 받아 학교건물을 건축하고 비리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 기억난 교수들은 국어는 시인 박선생이고, 정치학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외무부장관을 지낸 이선생이였고, 헌법학은 독일에서 공부하고 온 갈선생으로 기억이 남아있다. 박선생은 원효로 에서 같은 동래 살았기 때문에 간혹 버스나 전차에서 본적이 있고 선생님은 머리를 짧게 하시고 책한 권을 들거나 겨드랑에 끼고 다니셨다. 당시 선생께서는 학생들에게 글을 써오게 하여 평가를 자주 했는데 나는 버스표 한 장이라는 제목에 글로 좋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그때 총장 물러가라면서 면담하려간 학생회 선배 간부들은 성동경찰서에 피신해 있는 총장을 만나기 위해 경찰서까지 침입 서로 밀고 당기다가 2층밖 계단에서 학생들과 같이 떨어져 팔이 불어지는 불상사가 나기도 했다.

시위를 주로 교내서 하다가 61년도 새학기 부터는 과격해지고 교외로 나가 데모했는데 서울운동앞까지 나간 적이 있다. 교수들이 합세 데모할 때 나는 학원에 갔다가 귀가 길에 총소리에 놀라 시멘트로 만든 고정쓰레기통 옆에서 은신했고 총알이 내귀를 스쳐간 것 같았다. 그때 꼼짝없이 쓰레기통 옆에서 총맞아 죽는 줄 알았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아침에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교통이 두절된 원효로3가 집에서 용산을 지나 남산을 넘어 퇴계로 왕십리까지 걸어서 학교에 갔었다.

군사혁명으로 군인세상이 되였고 학교에서는 R.O.T.C.가 창설 되여 지원하여 훈련을 받다가 먼 통학 거리로 아침 일찍 교련시간 맞추지 못해 포기하고 학보로 단기복무하고 제대한 것이다. 군에 가기 전까지 나는 자취생활, 사돈집, 형집등, 안정이 안되고 하루살이 같은 삶으로 서울서도 학교를 다였다. 원효로 사돈집에 살 때는 어른사돈이 금융조합에 다니시다가 별세하시고 안사돈과 할머니, 고모, 그리고 딸 다섯 있는 어린아들 하나있는 집에서 살기도 했다.

형이 외국 가고 형수와 사돈처녀들과 같이 산다는 것은 형무소 생활이라고 표현함이 적합할까? 학교에서 강의가 끝나면 집에 들어가기 싫어 교내 나무 밑지나 남산 케이블카 아래 습속에서 비료푸대 몇 개로 요를 삼아 깔고 누워서 책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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