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산행기도와 왕건병마 훈련장/용인공원에 있는 아내 산소

하동정씨묘 고 정자심집사

아들꽃다발 권오연

=>영혼과 만나면<=

당신을 만나면 집안도 안녕하고 믿음도 성숙됐다고 전하고 싶네요. 당신을 만나면 행복과 슬픔 그리고 무엇이 소중한지 알았다고 전하고 싶네요. 당신을 만나면 다친 상처는 약으로 치료되지만 외로운 상처는 무어로 치료하는지 묻고 싶네요.

당신을 만나면 근심, 걱정하던 아들 제대 후 복학했다고 말하고 싶네요. 당신을 만나면 두 딸 결혼 하고 나도 정년 했다고 말하고 십고 요. 생각하기도 싫다하고 이 세상 것 다 놓고 천사가 되어 훨훨 날아가 버렸다. 당신은 받을 돈도 줄 돈도 나몰라 하고 말 한마디 않고 떠나버렸다. 당신은 새집 새 가구 새 냉장고 가득 가득 채워놓고 성경 찬송만 가슴에 안고 떠나버렸다당신은 딸 작품 예수님상이 입선된 줄도 모르고 며칠을 참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당신은 세 자녀를 다 길러 가르쳐놓고 혼인날도 보지 못하고 눈물에 예식장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나는 지난 식목일 날에 한식날 가나, 청명에 가나 마찬가지라는 옛 말을 생각하면서 아침 일찍 용인공원에 있는 아내 산소를 갔다. 산소에서 아내가 생전에 잘 부르던 찬송과 기도를 하고 높은 뒷산을 등산 겸 산행하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께 험한 산길 잘 다녀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고 길을 따라 오르니 길은 있으나 낙엽과 억새와 나뭇가지가 엉켜서 길 따라 가기가 어려웠다. 다른 산소에 왔던 두 형제 부부도 산을 오르다 부인들은 중도에 앉아있고 두형제만 정상까지 같다 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갔다 온 것을 보니 나도 갈 수 있는 산 길 이구나생각하고 힘들게 정상을 오르니 한 여름 같이 땀이 흘렀다. 정상에는 이천 463’이라고 표시되어있다. 아마 저 쪽은 이천 군 같았다. 이천 방향은 더 높은 산이 하늘을 가리고 서울 방향은 높은 봉우리들이 보였다. 더워서 잠바를 벗고 쉬었더니 다시 생기가 나고 저 봉우리를 따라 광주 성남 남한산성을 따라 집(태릉)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내 산소에 갔다가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걸어 고행에 추억을 만들고도 싶었고, 나의 건강도 체크하고 싶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먹을 것과 물 준비라고는 초부리 정류장 가계에서 찹쌀떡 한 갑과 음료수 한 병이 전부였다. 2시간정도 가서 첫 봉우리 563미터 정광 산 정상을 오르니 허기가 들고 갈증이 났다. 갈수록 산은 험하고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 뿐이니,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포기하고 내려가려고 양쪽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두 절벽이고 길이 없어 산 능선만 따라 가게 되어있었다. 별수 없이 산 능선을 따라가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고 여기서 산짐승이 나타나거나 지쳐 쓰러진다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었다. 밤에는 저 묘에 영혼의 천사들이 이 산 속에서 놀다 가고 아내도 그중 한 천사겠지.. 하면서 걸어가는데 허기와 갈증은 갈수록 더해갔다. 가지고 간 음료수와 모치 떡으로 조금씩 목을 적시고 먹는 흉내만 내며 걸어가면서 생각하니 쉽게만 생각했던 물에 대한 귀중함을 느꼈다.

 

홀로 있다는 것이 무서워 가방에 있는 손칼을 꺼내 펴서 들고 걷기도 하고 걸음을 중단하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두 손 높이 들고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칼을 들고 걷는 것보다 기도를 하고 나면 무서움이 덜하고 힘이 더 생기곤 했다. 목마르고 허기지고 무서움이 들 때마다 기도하며 그 험한 능선 길 높은 봉우리 정상을 오르내렸다.

 

정광 산 정상을 지나니 노고 산 정상에는 573미터가 표시되어있고, 노고 봉을 지나 발치 봉이 있고 가는 곳마다 간이 비행장이고 군사시설인 통신 미사일 시설이 무인화 되어 있었다.

 

높은 봉우리와 낮은 평지를 오르내릴 적마다 생각나는 것이 오르면 내림이고 내려가면 평지고 또 올라가게 되니 인생의 삶과 같다는 진리를 생각했다. 자연도 평탄한 길만이 아니라는 것을 벌써 아내 산소에서 출발한지도 5시간이 지나고, 백마산 용마 봉 502.9미터 정상 왕건 병마 훈련장 유래 비문이 있었다.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글이 써 있었다.

 

경기도 광주 백마산의 유래통일 신라 말 도선대사께서 답산 길에 이산 모양을 보시고 고려 태조가 될 왕건 장군이 천하를 지휘할 때 타실 백마와 같다하여 백마산이라 칭하고 이산 요소요소마다 말과 관련된 여러 지명을 붙인 후 근처에서 왕건을 비롯하여 많은 무사를 모집하여 병마를 훈련시켰다. 도선대사는 일찍이 왕건의 출생과 고려의 건국을 예언하는 이 땅의 풍수의 원조이시다. 도선대사 이론은 음양지리설, 풍수상지법을 주장하였다.

 

전 건국대 문리대학장 이훈종/자료 발굴자 황재권이라고 비석이 정상에 있다. 이 산은 용인 초부리에서 서울 방향으로 산등성을 따라가면 우측은 여주 이천이고 좌측은 경기도 광주군이다. 백마산 용마 봉에서 분당 방향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남한산성에 있던 특전사가 이곳에 옮겨와 훈련소리가 들리곤 한다. 거기서 한 시간 정도 더 가면 광주군 초월면 대 쌍령리 산이고 그 정상에는 448미터라고 써있다. 그 산을 중심으로 좌측은 광주읍이고 우측은 곤지암이다. 그 밑을 내려오면 급경사인데 옆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면 계약신학대학이 있다.

 

그날 식목일이라 많은 성도들이 여러 교회서 식목행사로 나무를 심고 물을 실어다 주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에 거슬린 것은 모두들 간소한 옷차림으로 열심히 나무를 심는데 감색 양복 정장에 주변을 서성대는 분이 있었다. 아마 목사나 교수 같은데 작업 옷차림이 성도들의 비난에 대상일 것 같아서 그러구나 좀 좋지 않은 생각으로 내려오니 골짜기 물이 좋고 주변 저택들은 서울 성북동 주택들과 비슷했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초월면 농협 대로변에서 해장국으로 배를 채우고 동서울터미널 서울행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집에서 아침 6시경에 출발했으니 12시간이라는 시간동안 아내 산소에 갔다 온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도선대사와 왕건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하니 다음과 내용이 있다.

 

먼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런 글을 적는다고 비난하더라도 나는 상대방 글을 존경하고 타종교도 믿지는 않지만 비평은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도선대사의 예언이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주역에 능통하여 많은 기담신설을 남기고 도선이란 자신의 법명을 따 지은 도선비가로도 널리 알려진 도선대사는 무엇보다 풍수지리에 밝아 어떠한 지형(지맥)를 보아도 앞으로 닥쳐올 길흉화복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어느 곳에 묘를 쓰면 가정풍파가 있고 가출하는 사람이 있게 되며, 어느 곳에 집을 지으면 집안에 환난이 끊이지 않고 주색으로 패가망신을 한다는 등 보통사람으로서는 예측할 수 없고 상상 할 수도 없는 예언을 하였다. 이때 온 나라 백성들은 오르지 풍수지리에 의하여 행복과 불행이 가름된다고 생각하여 너나 할 것 없이 도선대사의 풍수지리설을 신주단지 모시듯 믿게 되였다.

 

사실 도선대사 자신도 태어난 과정부터 신묘함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대사의 어머니는 눈보라가 뿌리는 추운 겨울에 일생처음으로 긴 낮잠을 자고 있었다. 혼자 사는 과부라 배고픔을 면키 위해서 날품팔이 등으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라 낮잠은 생각지도 못할 처지였다. 그날도 밖에는 하얀 눈이 소복 히 내려 발목이 빠질 정도여서 문 밖 출입은 생각지도 못하고 방안에서 삯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얼마쯤이나 바느질을 했을까?

 

졸음이 솔솔 몰려오자 대사의 어머니는 한 손에 바늘을 든 채 울퉁불퉁한 벽에 기대여 스스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꿈에서 백발도사가 나타나 큰소리로 이렇게 외쳐 댔다.

 

- 가엾은 지고 그대의 착한 마음에 내가 왔노라. 얼른 일어나 마을 우물가에 가보라. 거기에 파란 오이가 하나 있을 테니 그것을 아무도 보이지 않게 먹을 지라 잠에서 깨어난 대사어머니는 현몽한대로 마을 우물가로 가보았다. 그랬더니 꿈속에서 도사의 말같이 과연 파란 오이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녀는 오이를 치마폭에 싸 가지고 와 누가 볼까 두려워 금방 먹어 치웠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나자 이상한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대사의 어머니 배가 차츰차츰 불어나 영락없는 임신이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혼자 사는 과부가 느닷없이 임신을 하다니? 남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이고 흉측하기도 해서 고민하다가 그만 마을을 떠나 산기슭에 움막을 치고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모진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낳았으나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먹을 것도 없고 남들이 눈치라도 채는 날에는 흉물스러워 생각이 들어 할 수 없이 아이를 숲속에 버려두고는 전에 살던 마을 집으로 돌아와 하룻밤을 지냈다. 하지만 숲속에 버려진 아이 생각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 숲속으로 다시 돌아가 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었다. 버려진 아이를 비들기가 모여서 감싸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미 죽었거나 죽음 직전에 있어야 할 아이의 얼굴이 그토록 평화스러울 수가 없었다. 신기하게 느낀 대사 어머니는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기르기로 마음을 달리 먹고는 그 숲속에 버려진 아이를 비들기가 돌봤다는 의미에서 아이 이름을 구림(숲속 비들 기)이라 불렀다. 그 후 아이는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으나 열세 살 때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올 데 갈 데가 없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입산수도하여 법명을 도선이라 받았다.

 

성장하여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가 하루는 송학에서 머무르고 있는데 하늘로부터 좋은 전기를 받은 길지가 발견되었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그 길지는 오색의 무지개가 서려있는 것처럼 보여 대사는 그곳을 직접 가보기로 했다. 가서보니 그 근처에다 집을 짓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왕융이란 이였는데 대사는 그에게 눈에 보이는 길지를 가리키며 저기에다 새로 집을 짓게 되면 틀림없이 왕이 될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 깜짝 놀란 왕융는 대사에게 그러나 지금은 제가 자식하나 없는데 대사의 이야기와는 전혀 거리가 먼 듯하오. 혹 제가 집을 지을 길지가 아닌 게 아닌 지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도선대사가 껄껄 웃으면서 이곳 산수는 빼어난 곳이 많아 내가 시키는 대로 집을 짓는다면 반드시 득남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득남이 아니고 득국까지 하게 될 것이오. 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왕융은 대사가 시키는 대로 독특한 건축 비법에 의하여 집을 지었다. 그 집을 짓고 2년 될 무렵쯤 옥동자를 얻었는데, 그 옥동자가 바로 후일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었다. 왕건은 고려 태조가 된 후 도읍을 아예 송악(지금개성)으로 정하고 국가 부흥에 힘썼다고 한다.

 

도선은 어떤 사람인가? 속성 김. 호 옥룡 자. 전남 영암출생. 15세에 지리산 서봉인 월류봉 화엄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불경을 공부하고, 4년만인 846(문정 왕8) 대의를 통달, 신승으로 추앙 받았다. 이때부터 수도행각에 나서 동리 산의 혜철을 찾아가 무설 설 무법 법을 배웠으며, 23세에 천도 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운봉 산의 굴속에서 참선 삼매한 후 태백산 움막에서 고행하였으며 전라도 희양현 백계 산 옥룡 사에 머물다가 죽었다.

 

헌강왕의 초빙으로 궁중에 들어가 왕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쳐다. 그의 음양지리설, 풍수상지법은 고려 조선시대를 통하여 우리민족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친 학설이다. 죽은 후 효공왕이 요공국사라는 시효를 고려 현종은 대선사, 숙종은 왕사를 추정했고 인종은 선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에 관한 설화가 옥룡 사 비문 등에 실려 있다. 그리고 수많은 불 학도들이 신으로 추앙하였다. 왕건은 어떤 사람인가? 출생과 초기의 이력은 성은 왕. 이름은 건. 자는 약천.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이며, 어머니는 한 씨이다. 송학(개성)에서 출생하였다.

 

후삼국시대에 궁예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하고, 철원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궁예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군사 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900년에는 경기도 광주, 충주, 청주 및 당성(지금: 남양), 괴양(지금: 괴산)등의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이 되었다. 903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 군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부근 10여개 군현을 쳐서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필자 권치남 고향는 완도군약산면( 조약도)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으로 새금 현에 속했다가 백제가 망한 후 신라 흥덕왕 3828년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했다. 조약도은 1501년에는 강진 현 칠량면에 속했다가 1896년 고종33년 주변 섬이 설 군 되므로 조약 면으로 칭하고 1916년 행정 구역 계층으로 고금면과 통합, 발전하다가 1949년 고금면에서 분열하여 현재 약산면으로 됐다고 한다. 천 년 전 에는 해상 왕국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고려 현종 때는 이곳 여러 섬을 3개로 나누어 완도, 고금도, 신지도, 조약도, 청산 도를 동부로 강진군에 평일도 생일도 금당도(금일 면)장흥군에 또 서남부 소안도, 노화도, 보길도, 자귀도는 영암군에 속했다고 한다.) 지금 강진군-장흥군-영암군은 우리나라 최남단 도서 주변 군들이다.

 

이해에 양주수 김인훈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달려가 구하여 주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 해에 그 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으로 승리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이 올라 시중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 배현정, 신숭겸, 복지겸등의 추대를 받아, 918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 이흔암등의 반역사건등이 그것이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적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탄력성 있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 나갔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 정책은 민심안정책이었다. 따라서 신라말기 이래 크게 문란하여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제도적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 유도의 표방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신라말기이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나갔다. 각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태조는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인 궁예-견훤에게서는 볼수없은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흥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여량 때문 이였다. 그리하여 919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 후백제, 고려의 후삼국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친화정책을 썼다.

 

이해 10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후백제와 결전하여 이기기 위하여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초기에는 후백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화전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 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새 왕조의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왕건의 후삼국의 통일은 930년 태조는 고창(지금 안동지방)전투에서 견훤의 주력 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후백제의 왕실 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되는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같은 해 10월에는 신라왕의 자진 항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 해 졌다.

 

마침내,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지금의 선산)의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보라 왕건의 태생에서 삶에 노력 병마훈련에서 후삼국통일 주역이 되기까지 지혜로운 삶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계화, 민족분단, 가정의 불화, 자신의 삶을 주변들의 생활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좋은 교훈이다.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왕건의 삶을 다시 조명한 지금에 연속극 고려 태조 왕건을 다시 생각하려한다. 산행기도는 선교사님들의 특별한 기도시간이다. 영 육간에 강건 기원을 주님께 바라는 기도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