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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도이야기

권치남님 2022. 10. 21. 17:28

 

책머리에

공직생활 33년 사지에 내 글이 실렸다. 교회 주보 동원문단에도 내 글이 실렸다. 여기저기 직원들이 전화가 걸려오고 교회 장로님도 칭찬을 한다. 신이 나서 더 쓰고 싶어 다. 지금부터 30년 전후 일이다.

 

나의 글 중 늦었지만 시작이 반을 읽고 선평한 월간 ,뷰티리이프, 주간 한 분 순 작가는 ,늦었지만 시작이 반, 을 선평한 글 중 ,명언을 적재적소에 쓸 줄 아는 솜씨, 자주 글을 쓰면 세련 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라는 글에 더욱 신이 나서 열심히 글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용어를 잘 사용하지 못해 상부로부터 주의를 받기도 했다. 나는 글 쓴 것을 중단했다. 글쓰기가 무서웠고 다시 쓸 용기가나지 않아다.

 

다시 글을 시작한 동기는 74세 임 할머니의 수필가 등단이라는 신문 기사를 읽고 나도 늦지 않아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었다. 교회 주보문단에 다시 기교했다. 이제 모든 교인 칭찬에 나도 신이 났지만 아내의 기쁨이 더 한 것 같아서 더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러나 갑자기 동반자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진솔한 내 마음 깊숙이 뭉글대는 생각들이 글로 표현한 것이다.

 

이 책은 나의 삶 나의 글이다. 내 인생에서 나의 과거를 고희를 지나고 아내와 사별 후 홀로 십 오년 살아온 지금 내 인생에서 한권의 책을 이 땅에 남기고 싶다.

 

차 레

1. 조약도에서

2. 강진군에서

3. 서울에서

4. 대학생활

5. 형제를 내 몸 같이

6. 노총각 결혼

7. 자녀 셋 대학가기 시작.

8. 정말 힘든 일은 추운 밤 기다림

9. 나의 공무원 한직은 기회

10. 전곡리에서

11. 300분의 시간

12. 국산교환기 TDX를 배웁시다

13. 늦었지만 시작이 반

14. 한분수 (월간 '뷰티라이프')작가의 선평

15. 자연스러운 O.J.T교육장

16. 인수공 작업과 초복날

17. 깨끗한 정신 건강한 몸

18. 우리과 GIRO

19. 뿌리고 가꾸어야 하는 노사간의 우리 사랑

20. 생활화된 우리 집 새벽예배

 

차 레

21. 술을 즐기던 자가 그리스도의 영을 좇는 자로

22. 천사가 되어 하나님 곁으로 가버린 당신!

23. 마음을 비우고 참고 남을 배려

24. 중국 기독교와 역사

25.가정교회는 농촌과 도시에 편재

26. 삶은 목적이 있어야 한다.

27. 학자금과 장학금

28. , 정자심 집사를 기리며

29.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다.

30. 추도사 1

31. 인생도 다복도 잠깐

32. 죽음과 퇴직은 선후배가 없다

33. 백수의 하루

34. 어디로 가야하나

35. 희망에 전당 두라 노

36. 믿음으로 살아가자

37. 사람은 열두 번 변한다는데.

38. 추석날 당신 곁에서

39. 참된 기도가 응답을 받는다.

40. 추도사 2.

 

차 레

41. 추도예배 순서

42. 산행기도와 왕건병마 훈련장

43. 영혼과 만남

44. 서울안의 나

45. 썩은 것에 기도 마라

46. 빈 잔

47. 회갑 후 다시 공부 시작

48. 노년에 처음 받은 두라 노 강의

49.나의 노년봉사활동체험

50. 히브리인 정착 도시체험 봉사

51. 나는 무관심 죄인이다.

52. 요나 3일 영성 원 편지1. 2

53. 추도사3

54. 아들의 사각모 길

55. 소록도 순교지 기행

56. 북한 땅 평양에 가다(2차 선교 여행)

57. 북한 개성 관광(3차 선교여행)

58. 허리신경 치료과정기록

59. 사별한 아내 되새기며 신앙의 가족매진

60. 내가 겪은6.25 다시는 이 땅에 전쟁 없기를

61. 남북 통일시대를 대비한 선교 연구

 

1. 조약도(약산)에서

새벽닭이 울 무렵 나는 섬 조약도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삼재라 불렸다. 아버지는 학력은 무학이 전부지만 머리가 좋아 위로 두 형들의 이름을 돌림자도 안인 끝 자를  재자로 지으셨으니 셋째 나를 편하게 삼재라 지어 부른 것 같다. 그런데 우체국에 근무하시던 유식한 이모부님께서 삼재는 일본사람 이름 같고 천, 지, 인, 을 삼재라 하기 때문에 사람 이름이 너무 좋아도 팔자가 나쁘니 치 남 이로 다시 지어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지금도 고향 분들은 나를 삼재라 부른다. 나의 어머니는 태몽이 좋았고 띠와 시가 좋을 때 태어나서 성격이 온순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면서 좋아 하셨다고 한다. 
셋째 득남을 기뻐하신 어머니는 아들을 연속 셋을 낳고 보니 남존여비 사상이 남 보다 강하신 아버님께 여자로서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가정 일을 타합하지 않고 혼자서 처리하신 아버지 성격에 여자로서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만삭된 아내를 나몰라하고 밤새워 투전(화투)만 하고 다니시고 내가 태어난 순간에도 투전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득남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아 투전이 잘되어 그 날 밤 많은 돈을 땄다고 한다. 그 후 부터는 그 돈으로 집안을 돌보고 일도 열심히 했다고 어머니는 이야기 하셨다. 

 

이렇게 서러움을 받고 태어나서 자랐고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걸음을 간신히 걷기 시작할 때 우리 집 부엌의 바닥이 흙 이여서 울퉁불퉁한 그 위를 아버지 신발을 끌고 부엌으로 어머니를 찾아가는데 뒤에서 형이 신발 뒤끝을 밟아 앞으로 넘어져 이마를 많이 다쳐 상처가 생겼다. 그때 상처 부위에 된장을 발아 치료 했다. 지금도 이마 중앙에 흉터가 있다.
일제 때는 남단 섬 조약도는 노름(도박)이 심했다고 한다. 기관에서 간섭도 심하게 하지 않았고 화투를 이용 일본 사람들이 보급해서 한국 사람들 정신을 방탕께 했다고들 한다. 왜정 때 나서 자라고 해방이 되기 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일본어를 좀 배우다가 해방이 되고  한글을 배우다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그래서 일본어도 한글도 배운 척 만척하다 초등학교 입학을 했기 때문에 일본어를 모른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우리 집은 아버지가 노름도 않고 농사일을 열심히 하시여 논밭을 장만했기 때문에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가족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농사일 이였다. 그렇다고 머슴(일군)을 놓고 살 형편도 아니었다. 많은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형들이나 나는 아버지의 일을 돕지 않으면 감당할 수가 없었고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에 얻어맞기 일수 고 학교는 다녔지만 공부는 뒷전이고 힘든 일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도 곡식은 매상하고 감자로 끼니를 때우면서 일을 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집에 오래 지체하지 못하고 감자를 김치에 싸서 먹은 둥 마는 둥 하고 산이나 논밭으로 나가야 아버지는 좋아 하셨다. 

 

우리 집에서는 공부보다는 일의 비중이 더 켰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근면하시고 자수성가로 가난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때쯤 큰형은 부산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우리 집은 인민군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목받았고 큰형은 부산에서 대학을 입학했는데 미군잡지 배달 아르바이트(알바)하고 남은 책들과 교련 책이 집에 있었는데 그 책들이 발견되면 연행되어 갈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혜를 발휘하여 교련 책과 미군잡지를 거름덩이 속에 깊숙이 파묻고 형은 소 막사 위에 싸놓은 짚덩이 속에 방을 만들어 피신시켜 밥을 넣어주고 앞에는 짚단으로 가려서 아무도 모르게 은신시켜 주위사람들의 눈을 피하게 하였다. 그렇지 않은 면장 자식이나 부잣집 자식들은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연행해 두 손을 뒤로 꽁꽁 묶어 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렸다고 한다. 

 

돌을 몸에 메는 까닭은 바다에서 헤엄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시체도 육지로 밀려가지 않고 바다에 가라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체들이 고향 섬 조약도(약산면) 바닷가로 밀려왔다는 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섬에서는 아이들이나 학생들이 마을 별로 편을 짜서 전쟁과 같은 싸움을 심하게 했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아이들이나 학생들 싸움이 너무 심하더니 낙도까지 인민군이 들어오고 온 마을이 전쟁터로 변했다고 수군거렸다. 싸움도 육 박 전이였고 던진 돌멩이는 총알 같이 나르고 깡통 속에 솜을 넣고 기름을 부어 불 부처 상대방에게 던졌다. 지금 같으면 데모대 화염병과 유사했다. 또 이웃 학생들이 학교에 가는 길을 막고 먼 산길로 돌아가게 하고 여학생들은 남학생들 괴롭힘 때문에 학교를 가지 못 하기도 했다. 그때 학교운동장에서는 1년에 한 두 번씩 활동사진 (영화)가 들어왔는데 여학생들은 짓궂은 남학생들 때문에 구경 다니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조약도에도 인민군이 들어와서 6.25전쟁이 이곳 섬에서도 경찰과 교전이 심했다. 마을 아이들과 학생들의 패싸움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 집은 지대가 높아 경찰과 인민군에 교전상황을 다 볼 수 있었다. 육지에서 사격한 포탄은 섬에까지 날아와 힘없이 털어지고 마을 사람들의 육성으로 연결된 전달은 경찰의 통신망을 대신했고 경찰도 일부 주민도 산으로 피신했는데 산 위에서 경찰은 실탄을 운반해 달라고 아우성 이였다. 

 

그때는 면사무소나 지서(지구대)는 이미 인민군이 점령했고 앞산 정상에는 인민군 선발대 1개 분대 숫자가 이 나무 저 나무 이 숲 저 숲에 숨어서 기어서 돌격하여 인민군 깃발을 꽂으려고 엄호 속에 쏜살같이 올라와 깃발을 꽂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전 투 모나 전투복이 숲에서 노출을 방지하는 방법도 알았다. 우리 집 앞산 정상은 인민군이 점령하고 인민군의 깃발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뒷산에 있는 경찰들은 연락망이 끊겨 별수 없이 제주도방향으로 배를 타고 이웃면(신지)으로 후퇴하고 있다. 미리 후퇴하지 못한 경찰들은 인민군에게 포위되어 오도 가도 못하고 도간에 든 쥐가 된 상황이 되어 어쩔 줄 모르고 수수밭 속에서 총과 경찰복을 버리고 농사꾼 복장으로 갈아입고 은신하기도 하고 바닷가에서 포위된 경찰은 총을 들고 바다 물이 들어오는데도 바다 속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가고 인민군이 자수하라는 소리치고 총을 쏘아도 경찰들은 끝까지 총을 버리지 않고 바다로 계속 들어간다. 어차피 죽을 몸 바다 속에서 죽지 인민군 총에는 죽지 않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해는 서산에 걸려있고 경찰들은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가을 햇살은 유난히 붉게 비추고 저 해가 지면 경찰관의 운명도 같이 끝나지 생각하니 어린 내 마음도 슬퍼졌다. 밤이 지나 아침이 되니 몇 번의 파도는 시체를 씻어 갔는지 총을 든 채 쓰러져 있는 경찰을 마을 분들이 끌어내고 있었다.

 

100호가 넘는 시골의 큰 동네는 인민군이 점령했고 인민위원회청년과 여성동맹위원회가 조직되어 부잣집이나 상급학교에 다니는 자식 둔 가족들을 괴롭혔다. 마을사람들은 세상이 바꿔지니 마을 분위기가 완전히 바꿔졌다고 수군거렸다. 서로 감시하며 부잣집의 물건을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듯 가져갔다. 
그러나 인민군이 후퇴한 후로는 다시 물건을 원상태로 갖다 놓기는 했지만 인민군에 동조하여 주민을 심하게 괴롭혔던 사람들은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그러니까 인민군들에게 동조했거나 협조한 가족들이였다. 작은 섬 마을 주민들은 서로 형제들 같이 살아왔는데 며칠 사이에 서로 원수가 되었다. 

 

자식을 잃은 유학생 부모는 자식의 친구들이나 상급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을 보면 내 자식 어디 갔느냐 하며 눈물이 끊질 줄 모르고 통곡하니 살아남은 동료학생들도 괴롭고 힘든 일이다. 

 

그 때 자식 잃은 부모들을 만나기가 겁이 났을 것이다. 우리 집도 아버지의 지혜로 큰형은 희생되지 않았지만 큰형이 상급학교 학생이었고 아버지가 자수성가하여 부자란 말을 들였기 때문에 인민군과 협조한 주민들은 쌀이 가득한 쌀독과 소에 차압을 부쳐 놓고 그들 승낙 없이는 사용하지도 먹지도 못하게 하였다. 인민군은 미군 인천 상륙작전으로 육지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제주도(신지면) 방향으로 후퇴했던 경찰들은 다시 태극기를 앞세우고 애국가을 부르며 우리 집 앞길로 지나 장용 리 소재  지서 (지구대)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숨은 주민들에게 우리는 인민군이 아닙니다. 

 

우리 경찰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주민을 보고 태극기 흔드니 숨어있던 주민들도 나와서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에 몇 몇 주민은 경찰태극기를 보고 심통해 하던 주민들도 있었다. 며칠 사이로 마을은 다시 음지가 양지로 양지가 음지로 변한 것이다. 음과 양이 바꿔졌던 불편한 상태는 계속된 것이다. 

 

서울은 다시 부산에 있던 정부가 서울로 올라오고 형이 단이던 서울대학교도 부산에서 정부와 함께 서울로 옮겨감으로 형도 서울로 가게 되었다. 우리 집은 형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농사일에 사용 하던 인민군에 차압 되였던 소를 마량 장에 끌 고가서 팔아 학비를 마련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집은 부산 연고가 서울로 바꿔진 것이다. 우리 집은 부자라고 했지만 형의 계속된 학비조달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실정이고 둘째형도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나도 초등학교를 간신이 졸업하고 상급학교의 진학을 포기했다가 나의 배워보겠다는 의지하나로 늦게나마 상급하교에 진학했다. 

 

완도군 약산면(조약도)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초등학교졸업 때까지 일제치하로부터 해방과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섬에서 지나고 빈가에서 부자라는 가정을 이루는 아버지를 도우며 살아온 내가 체계적으로 공부만 했던 것보다 살아가는데 좋은 경험이 되고 있다. 조약도 섬은 농사만 짓는 농촌이 아니라 어촌이라 집안 일 들이 다양하고 농사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겨울에 김(해태)을 추운 엄동설한에 등잔 불빛 밑에서 온 식구가 혼연 일체가 되여 한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김을 생산하여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에 주민들은 매년 추석이 지나기가 무섭게 대나무와 말장을 준비하여 배로 실어다가 말장을 물 빠진 바다 벌 밭 위에 꽃 고 거기다가 대나무를 가늘게 쪽에서 새끼로 엮어 혼자서는 들지도 못할 정도로 크게 만들어서 말장을 세워 놓은 바다위에 펴서 떠내려가지 못하게 총총히 매달아 놓으면 밀물썰물 바다 물이 와다 갔다하는 동안 바다 속에 잠긴 대나무에 김의 씨가 묻어서 자라면 찬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에 배를 타고 바다에서 김을 채취해 오면 저녁에 잠을 설쳐가며 파래를 등잔 밑에서 골라내 새벽녘에 김을 칼이나 기계로 잘게 조사서 물가로 가지고 가서 짠물을 시쳐내고 정해진 규격에 물과 혼합된 김을 부어서 기술적으로 발장에 나열하고 한장 한장 많은 장수를 만들어 쌓아 놓으면 아침을 먹고 온 식구들은 건장(김을 말리는 곳)에다 한장 한장씩 펴서 해가 뜨기 전에 널어놓고 마르면 다시 한장 한장 거둬 다가 집이나 건장 앞에서 김과 발장을 분리 정리하고 저녁이 되면 또 바다에서 체취에온 김을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밤이 깊도록 잠도 자지 않고 새우 눈으로 김과 파래(청 태)를 구별하는 작업이 한겨울 동안 반복된다. 그렇게 만든 김은 규격에 맞게 정리하여 규격 종이 띠로 100장을 한속으로 묽어서 잘 정리하여 괴 짝에 보관해 놓았다가 검사 날이 오면 판정을 받아 등급에 따라서 돈을 받아온다. 

 

날씨가 좋아서 김 품질이 좋아 판정을 잘 받으면 적은 량으로도 많은 돈을 받아오게 되고 그 날은 집안분위기가 좋아져서 고생했던 일을 다 잃고 그렇지 않은 날은 집안분위기는 온 식구가 우울하고 아버지의 눈치만 보게 된다. 

 

이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하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진질(바다에서 자란 풀)을 배로 채취하여 산만한 덩어리를 배로 실어다가 쌓아 놓고 썩혀서 그 것으로 농사 퇴비로 사용하는데 그 일은 더욱더 힘이 든다. 또 바다고기를 잡아다가 반찬도 하고 많이 잡을 때는 즉석에서 팔아서 돈을 만들기도 하고 맛있는 귀한고기는 손질해서 잘 말려 보관했다가 제사나 명절 때 손님이 오면 상에 오른다. 

 

이렇게 농촌과 달리 어촌은 할 일도 많았지만 김을 일본으로 수출했기 때문에 주민소득은 많았다. 근면하고 자식들이 많은 집은 한겨울 지나면 집안이 여유가 생기고 자식들도 상급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겨울 한때는 지폐를 동네 개들도 물고 다닌다고들 했으니 정신이 바로선 사람은 자식들 공부시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재산을 모으거나 어렵게 온 식구가 모아놓은 돈을 술이나 노름으로 허비하였다. 

 

조약도는 지금 행정구역이 완도군 약산면이다. 좁은 섬치고는 높은 산이 많다. 그때는 산이나 바다는 부락공동 소유로 누구나 부지런하면 먼저 점유하여 한 겨울 탤 나무를 준비하고 김(해태)도 많이 생산 할 수 있었다. 

 

산이나 바다도 목이 좋은 데가 있다.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주민들 간에 싸움도 있고 그런 감정으로 집안 간 원수같이 살아온 사람들도 있고 빈부의 격차는 커지고 지주와 소작인이 생기고 친일파 권력을 등에 업고 있는 집안은 지주가 되고 예나 지금이나 배우지 못하고 힘없는 집는 소작인으로 항상 지주 집에 가서 일해주고 종(머슴)노릇을 하면서 힘든 일을 해서 대가를 받아서 가족이연명해 왔다. 

 

조약도(약산면)는 산이 좋아 목축업도 많이 했다. 산을 소유한 집도 있으나 대게는 짐승을 기르지는 않고 공동 산에 집집마다 소나 염소 몇 마리씩 기른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서 오면 곧바로 지게를 지고 뒷산 높은 곳에 가서 아침에 내다놓은 즉 방목한 소3마리와 염소2마리를 끌고 지게에는 풀을 잔뜩 지고 경사진 산을 내려오면 얌전한 소는 길을 따라서 집으로 오지만 촐랑대는 염소는 짐을 진 내 아래 다리와 지게 두 발목 네다리를 고삐로 휘어 감고 넘어뜨리고는 남에 논밭 가서 곡식을 먹으면 주인은 마을에서 쳐다보고는 소리소리 지르면서 욕설을 했다. 

 

나는 급하게 일어나 지개 풀을 다시 정리해 지고 소나 염소를 다시 끌고 올 때는 정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죽고 싶고 양다리가 불구인 놀고먹는 마을친구가 부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초등학교시절에 많은 일로 고생하면서도 상급학교에 가고자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공부도 하고 싶고 남과 같은 중학교 교복도 그리웠고 방학 때 상급학교 간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고향에 내려와 뽐내고 일도 하지 않고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볼 때면 정말 부러웠다. 
집 안 일을 피해 어디로든지 집을 떠나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그때는 초등학교에 임시로 공민학교라고 해서 비인가 중학교과정이 있었다. 

 

그곳을 아버지 몰래 입학했고 일 때문에 중학을 보내지 못한 아버지도 승낙하여 일 년 간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강진 큰댁과 이모님이 살고계신 중학교에 편입시험을 보아 2학년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러움을 받고 태어나서 자랐고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걸음을 간신히 걷기 시작할 때 우리 집 부엌의 바닥이 흙 이여서 울퉁불퉁한 그 위를 아버지 신발을 끌고 부엌으로 어머니를 찾아가는데 뒤에서 형이 신발 뒤끝을 밟아 앞으로 넘어져 이마를 많이 다쳐 상처가 생겼다. 그때 상처 부위에 된장을 발아 치료 했다. 지금도 이마 중앙에 흉터가 있다.

 

일제 때는 남단 섬 조약도는 노름(도박)이 심했다고 한다. 기관에서 간섭도 심하게 하지 않았고 화투를 이용 일본 사람들이 보급해서 한국 사람들 정신을 방탕께 했다고들 한다. 왜정 때 나서 자라고 해방이 되기 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일본어를 좀 배우다가 해방이 되고 한글을 배우다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그래서 일본어도 한글도 배운 척 만척하다 초등학교 입학을 했기 때문에 일본어를 모른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우리 집은 아버지가 노름도 않고 농사일을 열심히 하시여 논밭을 장만했기 때문에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가족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농사일 이였다. 그렇다고 머슴(일군)을 놓고 살 형편도 아니었다. 많은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형들이나 나는 아버지의 일을 돕지 않으면 감당할 수가 없었고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에 얻어맞기 일수 고 학교는 다녔지만 공부는 뒷전이고 힘든 일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도 곡식은 매상하고 감자로 끼니를 때우면서 일을 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집에 오래 지체하지 못하고 감자를 김치에 싸서 먹은 둥 마는 둥 하고 산이나 논밭으로 나가야 아버지는 좋아 하셨다.

 

우리 집에서는 공부보다는 일의 비중이 더 켰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근면하시고 자수성가로 가난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때쯤 큰형은 부산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우리 집은 인민군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목받았고 큰형은 부산에서 대학을 입학했는데 미군잡지 배달 아르바이트(알바)하고 남은 책들과 교련 책이 집에 있었는데 그 책들이 발견되면 연행되어 갈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혜를 발휘하여 교련 책과 미군잡지를 거름덩이 속에 깊숙이 파묻고 형은 소 막사 위에 싸놓은 짚덩이 속에 방을 만들어 피신시켜 밥을 넣어주고 앞에는 짚단으로 가려서 아무도 모르게 은신시켜 주위사람들의 눈을 피하게 하였다. 그렇지 않은 면장 자식이나 부잣집 자식들은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연행해 두 손을 뒤로 꽁꽁 묶어 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렸다고 한다.

 

돌을 몸에 메는 까닭은 바다에서 헤엄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시체도 육지로 밀려가지 않고 바다에 가라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체들이 고향 섬 조약도(약산면) 바닷가로 밀려왔다는 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섬에서는 아이들이나 학생들이 마을 별로 편을 짜서 전쟁과 같은 싸움을 심하게 했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아이들이나 학생들 싸움이 너무 심하더니 낙도까지 인민군이 들어오고 온 마을이 전쟁터로 변했다고 수군거렸다. 싸움도 육 박 전이였고 던진 돌멩이는 총알 같이 나르고 깡통 속에 솜을 넣고 기름을 부어 불 부처 상대방에게 던졌다. 지금 같으면 데모대 화염병과 유사했다. 또 이웃 학생들이 학교에 가는 길을 막고 먼 산길로 돌아가게 하고 여학생들은 남학생들 괴롭힘 때문에 학교를 가지 못 하기도 했다. 그때 학교운동장에서는 1년에 한 두 번씩 활동사진 (영화)가 들어왔는데 여학생들은 짓궂은 남학생들 때문에 구경 다니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조약도에도 인민군이 들어와서 6.25전쟁이 이곳 섬에서도 경찰과 교전이 심했다. 마을 아이들과 학생들의 패싸움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 집은 지대가 높아 경찰과 인민군에 교전상황을 다 볼 수 있었다. 육지에서 사격한 포탄은 섬에까지 날아와 힘없이 털어지고 마을 사람들의 육성으로 연결된 전달은 경찰의 통신망을 대신했고 경찰도 일부 주민도 산으로 피신했는데 산 위에서 경찰은 실탄을 운반해 달라고 아우성 이였다.

 

그때는 면사무소나 지서(지구대)는 이미 인민군이 점령했고 앞산 정상에는 인민군 선발대 1개 분대 숫자가 이 나무 저 나무 이 숲 저 숲에 숨어서 기어서 돌격하여 인민군 깃발을 꽂으려고 엄호 속에 쏜살같이 올라와 깃발을 꽂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전 투 모나 전투복이 숲에서 노출을 방지하는 방법도 알았다. 우리 집 앞산 정상은 인민군이 점령하고 인민군의 깃발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뒷산에 있는 경찰들은 연락망이 끊겨 별수 없이 제주도방향으로 배를 타고 이웃면(신지)으로 후퇴하고 있다. 미리 후퇴하지 못한 경찰들은 인민군에게 포위되어 오도 가도 못하고 도간에 든 쥐가 된 상황이 되어 어쩔 줄 모르고 수수밭 속에서 총과 경찰복을 버리고 농사꾼 복장으로 갈아입고 은신하기도 하고 바닷가에서 포위된 경찰은 총을 들고 바다 물이 들어오는데도 바다 속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가고 인민군이 자수하라는 소리치고 총을 쏘아도 경찰들은 끝까지 총을 버리지 않고 바다로 계속 들어간다. 어차피 죽을 몸 바다 속에서 죽지 인민군 총에는 죽지 않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해는 서산에 걸려있고 경찰들은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가을 햇살은 유난히 붉게 비추고 저 해가 지면 경찰관의 운명도 같이 끝나지 생각하니 어린 내 마음도 슬퍼졌다. 밤이 지나 아침이 되니 몇 번의 파도는 시체를 씻어 갔는지 총을 든 채 쓰러져 있는 경찰을 마을 분들이 끌어내고 있었다.

 

100호가 넘는 시골의 큰 동네는 인민군이 점령했고 인민위원회청년과 여성동맹위원회가 조직되어 부잣집이나 상급학교에 다니는 자식 둔 가족들을 괴롭혔다. 마을사람들은 세상이 바꿔지니 마을 분위기가 완전히 바꿔졌다고 수군거렸다. 서로 감시하며 부잣집의 물건을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듯 가져갔다.

그러나 인민군이 후퇴한 후로는 다시 물건을 원상태로 갖다 놓기는 했지만 인민군에 동조하여 주민을 심하게 괴롭혔던 사람들은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그러니까 인민군들에게 동조했거나 협조한 가족들이였다. 작은 섬 마을 주민들은 서로 형제들 같이 살아왔는데 며칠 사이에 서로 원수가 되었다.

 

자식을 잃은 유학생 부모는 자식의 친구들이나 상급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을 보면 내 자식 어디 갔느냐 하며 눈물이 끊질 줄 모르고 통곡하니 살아남은 동료학생들도 괴롭고 힘든 일이다.

 

그 때 자식 잃은 부모들을 만나기가 겁이 났을 것이다. 우리 집도 아버지의 지혜로 큰형은 희생되지 않았지만 큰형이 상급학교 학생이었고 아버지가 자수성가하여 부자란 말을 들였기 때문에 인민군과 협조한 주민들은 쌀이 가득한 쌀독과 소에 차압을 부쳐 놓고 그들 승낙 없이는 사용하지도 먹지도 못하게 하였다. 인민군은 미군 인천 상륙작전으로 육지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제주도(신지면) 방향으로 후퇴했던 경찰들은 다시 태극기를 앞세우고 애국가을 부르며 우리 집 앞길로 지나 장용 리 소재 지서 (지구대)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숨은 주민들에게 우리는 인민군이 아닙니다.

 

우리 경찰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주민을 보고 태극기 흔드니 숨어있던 주민들도 나와서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에 몇 몇 주민은 경찰태극기를 보고 심통해 하던 주민들도 있었다. 며칠 사이로 마을은 다시 음지가 양지로 양지가 음지로 변한 것이다. 음과 양이 바꿔졌던 불편한 상태는 계속된 것이다.

 

서울은 다시 부산에 있던 정부가 서울로 올라오고 형이 단이던 서울대학교도 부산에서 정부와 함께 서울로 옮겨감으로 형도 서울로 가게 되었다. 우리 집은 형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농사일에 사용 하던 인민군에 차압 되였던 소를 마량 장에 끌 고가서 팔아 학비를 마련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집은 부산 연고가 서울로 바꿔진 것이다. 우리 집은 부자라고 했지만 형의 계속된 학비조달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실정이고 둘째형도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나도 초등학교를 간신이 졸업하고 상급학교의 진학을 포기했다가 나의 배워보겠다는 의지하나로 늦게나마 상급하교에 진학했다.

 

완도군 약산면(조약도)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초등학교졸업 때까지 일제치하로부터 해방과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섬에서 지나고 빈가에서 부자라는 가정을 이루는 아버지를 도우며 살아온 내가 체계적으로 공부만 했던 것보다 살아가는데 좋은 경험이 되고 있다. 조약도 섬은 농사만 짓는 농촌이 아니라 어촌이라 집안 일 들이 다양하고 농사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겨울에 김(해태)을 추운 엄동설한에 등잔 불빛 밑에서 온 식구가 혼연 일체가 되여 한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김을 생산하여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에 주민들은 매년 추석이 지나기가 무섭게 대나무와 말장을 준비하여 배로 실어다가 말장을 물 빠진 바다 벌 밭 위에 꽃 고 거기다가 대나무를 가늘게 쪽에서 새끼로 엮어 혼자서는 들지도 못할 정도로 크게 만들어서 말장을 세워 놓은 바다위에 펴서 떠내려가지 못하게 총총히 매달아 놓으면 밀물썰물 바다 물이 와다 갔다하는 동안 바다 속에 잠긴 대나무에 김의 씨가 묻어서 자라면 찬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에 배를 타고 바다에서 김을 채취해 오면 저녁에 잠을 설쳐가며 파래를 등잔 밑에서 골라내 새벽녘에 김을 칼이나 기계로 잘게 조사서 물가로 가지고 가서 짠물을 시쳐내고 정해진 규격에 물과 혼합된 김을 부어서 기술적으로 발장에 나열하고 한장 한장 많은 장수를 만들어 쌓아 놓으면 아침을 먹고 온 식구들은 건장(김을 말리는 곳)에다 한장 한장씩 펴서 해가 뜨기 전에 널어놓고 마르면 다시 한장 한장 거둬 다가 집이나 건장 앞에서 김과 발장을 분리 정리하고 저녁이 되면 또 바다에서 체취에온 김을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밤이 깊도록 잠도 자지 않고 새우 눈으로 김과 파래(청 태)를 구별하는 작업이 한겨울 동안 반복된다. 그렇게 만든 김은 규격에 맞게 정리하여 규격 종이 띠로 100장을 한속으로 묽어서 잘 정리하여 괴 짝에 보관해 놓았다가 검사 날이 오면 판정을 받아 등급에 따라서 돈을 받아온다.

 

날씨가 좋아서 김 품질이 좋아 판정을 잘 받으면 적은 량으로도 많은 돈을 받아오게 되고 그 날은 집안분위기가 좋아져서 고생했던 일을 다 잃고 그렇지 않은 날은 집안분위기는 온 식구가 우울하고 아버지의 눈치만 보게 된다.

 

이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하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진질(바다에서 자란 풀)을 배로 채취하여 산만한 덩어리를 배로 실어다가 쌓아 놓고 썩혀서 그 것으로 농사 퇴비로 사용하는데 그 일은 더욱더 힘이 든다. 또 바다고기를 잡아다가 반찬도 하고 많이 잡을 때는 즉석에서 팔아서 돈을 만들기도 하고 맛있는 귀한고기는 손질해서 잘 말려 보관했다가 제사나 명절 때 손님이 오면 상에 오른다.

 

이렇게 농촌과 달리 어촌은 할 일도 많았지만 김을 일본으로 수출했기 때문에 주민소득은 많았다. 근면하고 자식들이 많은 집은 한겨울 지나면 집안이 여유가 생기고 자식들도 상급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겨울 한때는 지폐를 동네 개들도 물고 다닌다고들 했으니 정신이 바로선 사람은 자식들 공부시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재산을 모으거나 어렵게 온 식구가 모아놓은 돈을 술이나 노름으로 허비하였다.

 

조약도는 지금 행정구역이 완도군 약산면이다. 좁은 섬치고는 높은 산이 많다. 그때는 산이나 바다는 부락공동 소유로 누구나 부지런하면 먼저 점유하여 한 겨울 탤 나무를 준비하고 김(해태)도 많이 생산 할 수 있었다.

 

산이나 바다도 목이 좋은 데가 있다.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주민들 간에 싸움도 있고 그런 감정으로 집안 간 원수같이 살아온 사람들도 있고 빈부의 격차는 커지고 지주와 소작인이 생기고 친일파 권력을 등에 업고 있는 집안은 지주가 되고 예나 지금이나 배우지 못하고 힘없는 집는 소작인으로 항상 지주 집에 가서 일해주고 종(머슴)노릇을 하면서 힘든 일을 해서 대가를 받아서 가족이연명해 왔다.

 

조약도(약산면)는 산이 좋아 목축업도 많이 했다. 산을 소유한 집도 있으나 대게는 짐승을 기르지는 않고 공동 산에 집집마다 소나 염소 몇 마리씩 기른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서 오면 곧바로 지게를 지고 뒷산 높은 곳에 가서 아침에 내다놓은 즉 방목한 소3마리와 염소2마리를 끌고 지게에는 풀을 잔뜩 지고 경사진 산을 내려오면 얌전한 소는 길을 따라서 집으로 오지만 촐랑대는 염소는 짐을 진 내 아래 다리와 지게 두 발목 네다리를 고삐로 휘어 감고 넘어뜨리고는 남에 논밭 가서 곡식을 먹으면 주인은 마을에서 쳐다보고는 소리소리 지르면서 욕설을 했다.

 

나는 급하게 일어나 지개 풀을 다시 정리해 지고 소나 염소를 다시 끌고 올 때는 정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죽고 싶고 양다리가 불구인 놀고먹는 마을친구가 부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초등학교시절에 많은 일로 고생하면서도 상급학교에 가고자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공부도 하고 싶고 남과 같은 중학교 교복도 그리웠고 방학 때 상급학교 간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고향에 내려와 뽐내고 일도 하지 않고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볼 때면 정말 부러웠다.

 

집 안 일을 피해 어디로든지 집을 떠나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그때는 초등학교에 임시로 공민학교라고 해서 비인가 중학교과정이 있었다.

 

그곳을 아버지 몰래 입학했고 일 때문에 중학을 보내지 못한 아버지도 승낙하여 일 년 간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강진 큰댁과 이모님이 살고계신 중학교에 편입시험을 보아 2학년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2. 강진군에서

 

나는 이제 집을 떠나 섬 조약도에서 육지 정규중학생이 되였고 그렇게 소원 이였던 교복을 입고 방학이 되면 부모님을 찾아 고향에 간다. 방학 때는 아버지가 좋아하신 술 한 병과 과자(사탕) 한 봉지를 사 가지고 부모님께 무릎 꿇고 큰절을 올린 기억이 생각난다.

그러면 아버지는 술을 이웃 어르신들과 나누어 마시고 어머니는 사탕을 좀 감추어놓았다가 우리 집 중학생 아들이 방학을 해서 집에 오면서 사왔다면서 자랑하셨다.

이제 나는 섬 조약도에서 육지 상급학교 학생이 되였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초등학교 때 육체적 고생이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때는 부모 밑에서 먹고 자는 것은 걱정 없었으나 이모 집에 살기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진에는 큰댁과 사촌누나 두 분 그리고 이모 등 여러 친척이 있었으나 어머니의 살붙이라고 이모 집에 있게 했는데 이모부가 병으로 돌라가시고 서른셋에 혼자되어 섬에서 과수원과 농사를 어린 자식들과 관리할 수 없어서 육지로 이사 와서 점방(구멍가계)이라도 해서 자식들과 먹고살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집안이 기울어져 가는 때라 어렵고 자식들과 먹고사는 것조차 힘들고 나중에는 자식들의 공부도 중단시키었다.

이모가 섬에서 이사한 이유는 이모부가 우체국에 근무하시다가 폐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이모부 친구가 과수원과 농사를 도와준다면서 간혹 찾아와서 도운 척 하더니 결국 서른셋 과부를 그대로 두지 않아 임신을 시켜 아들을 낳았는데 시골에서 챙 피해서 살 수 없어서 아들 둘과 시어머니 그리고 어린애를 데리고 시골의 유지 집이 폐가망신으로 그 좋은 살림을 처분해 가지고 강진읍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강진에 이사 와서도 과부가 홀로된 시어머니와 어린 아이까지 다섯 식구가 살아가기 힘든 상태에서 나까지 있어 생활이 곤란했다. 집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맡겨 놓았고 동생 고생한다고 식량은 넉넉히 보내도 나는 항시 배를 채우지 못해서 불만 이였다.

내가 먹을 식량을 보내도 기울어져 가는 가정에 보낸 식량은 밑 빠진 독에 물 붙기가 되고 말았다. 방도 모자라서 노하신 사돈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잠도 자보고 후에는 노쇠 하시여 거동이 불편하여 소 대변을 받다 내기도 하여 악취 때문에 그 방에 같이 있지 못하고 이웃에 살고게신 사촌누나 집에서 사돈어르신과 낮에도 불을 켜야 책을 볼 수 있는 골목 방에서 살면서 학교에 다니다가 도저히 불편하여 살수 없어 혼자 방을 얻어 자취를 하는데 식량과 반찬은 집에서 가져다 먹을 수 있었지만 밥할 탤 나무가 없어서 산에 가서 갈키를 가지고 낙엽 솔잎을 긁어모아 가져와서 밥도 해먹고 방에 불도 넣어 겨울을 보냈다.

이 뿐만 아니라 집에서는 학교납부금(학비)을 기한 내 보내지 않아 수업을 하지 못하고 수업시간에 퇴장 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납부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는 집으로 보내고 집에서는 돈이 없다고 공부 그만두고 농사일이나 하라는 아버지 호통에 울기도 많이 하며 어떻게 중학교를 갔는데 그만두라고 하는지 부모 자식 간에도 섭섭함이 많았고 원망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 여동생을 여자가 공부하는 것 보다 시집가서 살림 잘하고 애 낳고 살면 된다고 하나도 가르치지 안했다.

유교사상이 유난히 강하신 분이었다. 그래도 둘째형이 큰형과 동생 나 때문에 희생한 것을 보면 나는 부모님의 배려에 감사 했어야했다. 섬 조약도에서는 겨울 한때는 김을 생산해서 지폐를 개가 물고 다닐 정도로 돈이 흔하고 그 외에는 돈 구하기가 힘든 곳이고 많은 돈을 빌릴 때에는 전답을 잡고 꾸어주기도 했다.

큰형은 서울에서 나는 강진에서 돈을 가져가니 자식들 공부 가르치는 재미를 느낀 부모지만 집안 살림하고 상급학교 보내지 못한 둘째형과 어린 동생들을 생각할 때 돈이 물 솟듯 솟아도 힘들다고 자식 많은 것도 다 필요 없고 무자식 상팔자라고 칠 남매를 둔 아버지는 간혹 한숨을 쉬시며 불평도 많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상급학교 다니는 자식이 납부금 내지 못하고 방학도 안인데 육지에서 섬 집에까지 와서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어머니만 졸라대는 머리 큰 자식을 때리지도 못하고 이집 저집 생

활 비를 어머님께 꾸어오게 하여 그것도 납부금 반 생활비 반으로 쫓아 보내곤 했다.

아버지는 돈이 없어 그런지 절약하기 위함인지 요구한 액수에 전액을 주지 않고 모자라게 주기 때문에 항시 생활하기가 힘들고 방학을 맞이하여 집에 가기까지는 생활에 고통을 받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쌀독 깊숙이 감추어 놓은 돈을 아버지 몰래 간혹 보충해 주기도 하셨다.

학교에서는 도시락을 가져가야 하는데 그냥 가서 다른 학생은 즐거운 점심시간이라고 오전수업이 끝나자마자 삼삼오오 둘러서 밥을 먹지만 나는 혼자 운동장 가에 나무 밑에 앉아 있다 가 식사가 끝나면 교실에 들어가면 어디 가다 오느냐고 물어보면 점방(구멍가계)에서 빵 사먹고 온다고 거짓말도 많이 하고 굶고 지나기도 많이 했다. 그때도 지역차별이 있었다. 나는 타군이 고향이고 섬이라고 괄시하는 학생도 있었고 지금이나 그 때나 돈 없으면 왕따가 된 다

그때는 돈 없으면 모임에 참석 하지 못한다. 이렇게 강진에서 5년간을 중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게 된 것도 고향에서 힘든 일로 이곳에서 죽으면 죽어도 다시는 고향 집에 가서 어촌 일은 하지 않을 라고 결심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아버님께 힘든 일을 배우지 않고 귀엽게 자랐으면 몇 번이고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고 집에서 잠자리, 먹을 것 걱정 없이 부모님 밑에서 생활했을 것이다. 그때는 강진군이 영암, 해남, 장흥, 완도군 5개 군 중심지고 고등학교도 한곳 분 이여서 큰 도시로 유학하지 않은 사람은 다 이 학교에 다렸다.

 

3. 서울에서

 

나는 이제 강진 동성동 동문에서 어렵게 자취생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큰형이 서울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기 때문에 서울로 학교를 왔다. 아버지도 이젠 고향 온 것을 반대하시고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으니 서울 가서 형과 타합 하라고 하신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는 속담까지 하시면서 서울에 계신 형에게 맡기려는 생각 이였다. 나도 고3때는 서울 좋은 대학가서 공부하고 싶어서 막 무 간에 서울대 상대학장님이 같은 권가 종씨라 무작정 편지로 나도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더니 학장님께서 답장이 왔는데 잘 해보시오 라는 간단한 내용 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나 고3때 대학가고 싶은 심정이나 똑같았다. 그때 모두 대학을 서울까지는 생각지도 못했으나 나는 형이 있어 별수 없이 서울로 지원하게 된 것이다. 이제 다산 정양용 선생께서 귀양살이했던 강진 동성동 동문을 떠나 고향집 조약도에서 며칠간 쉬다가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 부모님이 싸 주시는 보따리 짐을 들고 집을 출발한 시간은 이른 아침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 천동 부두에 마량 가는 배를 타기 위에 떠난 것이다.

부두에 도착하여 조금 기다리니 마량 간 여객선은 기적소리를 내며 부두에 기다리는 손님들을 실고 출발을 알리는 배 고둥소리는 그리운 고향 조약도를 뒤에 두고 바다를 힘차게 가르며 한 바퀴 돌고 마량을 행해서 출발했다. 멀어져가는 조약도 산이 갈수록 멀리 보이고 육지는 크게 보였다. 이곳이 이순신 장군께서 왜적을 물리치신 곳이라 바다물살이 세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배는 요동을 친다.

조금가면 내릴 준비가 시작되고 방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고 짐을 챙겨서 배 입구로 놓고 서있다.

배가 부두에 도착하면 강진 가는 버스를 먼저 타야 좌석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배가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은 가지고온 짐 보따리를 이고, 지고, 들고 남녀노소 없이 버스를 행해서 경주를 하는 것처럼 힘을 다하여 달려간다. 이때는 부두가 온통 인정사정 보지 않고 우왕좌왕 수라장으로 변한다.

그러다 보면 어떨 때는 물에 빠진 사람, 짐을 빠뜨린 사람들도 간혹 생긴다. 재수가 좋은 날은 사람이 많지 않거나 짐이 간편하면 자리를 잡고 편안히 고려청자기가 발굴된 대구면을 지나 칠량면을 통과하면 군동면 큰댁이 있고 뒷산에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묘가 있다.

버스 창밖으로 잠깐 지나가지만 조상을 생각하다보면 차는 내가 다니던 학교 앞을 지나 강진읍 정류장에 들어선다. 여기서 또 한 번 광주행 버스를 옮겨 타야 한다. 여기서는 아예 자리를 잡을 생각을 말아야한다. 출발지 버스가 아니고 타군(해남. 장흥)에서 출발하는 경유버스라 이미 만원버스가 되어 있거나 아직 도착하지 않아 손님들은 줄을 서서 기다린다.

만원버스는 차장의 오-라이 소리로 출발하고 버스는 비포장 길을 안개처럼 먼지를 내면서 영산포를 지나 나주를 경유하여 광주로 향한다. 그런데 기차로 서울 간 섬사람은 목포 발 서울행 완행 밤 열차를 이곳 영산 포 기차역에서 차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하차하여 기차역까지 긴 다리를 짐을 이고 지고 들고 피난 간 사람들 저럼 줄을 지어 걸어간다. 짐에 따라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한 다리지만 나는 한번 도 가깝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지겹게만 느끼던 영 산 포 다리이다.

광주 가는 버스가 영산포기차역 근처 정류장으로 경유해서 내려주면 좋으련만 그때는 버스가 다리전 정류장에서 광주로 직행했다. 도보로 영산포기차역에 도착한 사람들은 집에서 가지고 온 김밥(김으로 싼 주먹 밥)이나 감자 또는 살문 계란을 꺼내서 각자 시장한 배를 채우고 기차역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아서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호남선 밤 완행열차에 몸을 싫고 상행(상경)하게 된다.

기차도 완행열차라 자리 잡기는 힘들고 재수 좋은 날은 의자를 기대고 서서 있거나 마음씨 고운 옆 사람을 만나면 의자 팔걸이에 엉덩이 반쪽만대고 앉아 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밤새도록 서있거나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도 있지만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고 고등학교를 갓 나온 나는 체면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서서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주변에 여학생이나 있으면 내 몸은 안절부절 경직되고 힘이 들어도 서서 있었다. 어떤 얌체족들은 짐 올려놓은 자리로 올라가서 팔자 좋게 두 다리 펴고 잠을 자다 밑으로 구르기도 한다. 열차는 대 전 역에서 국수를 먹을 시간을 주지만 나는 집에서 싸준 계란으로 대신한다.

좁은 통로에 서있으면 이동 주보와 역전 마다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사라고 좁은 통로를 지나면 잡상인들이 밉고 지나갈 때마다 짜증이 났다. 천안역에서는 호두과자를 사라는 소리에 새벽잠을 깨지만 구수한 천안사람 목소리는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호남선 열차 속에서 전라도 말소리는 대전국수를 먹은 후부터는 변성이 되어가고 천안역 호두과자 장사들의 소리는 서울역이 가까움을 알려주고 전라도사람 말소리는 변화하기 시작하여 말끝에 요 자 가 간혹 오르내린다. 말끝에 요 자를 사용한 것은 서울사람들 말이기 때문에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사람임을 숨기려는 뜻도 있었다.

서울역에 기차가 플랫 홈에 들어서기도 전에 사람들은 짐을 내리느라 분주해진다. 영등포, 용산, 서울역까지는 기차 안이 더욱 비좁아 진다. 내리는 사람들도 많지만 짐을 들고 통로를 왔다 갔다 하니 더 좁아진다. 서울역을 내리면 전날 집에서 출발시간인 아침시간이 다되고 서울역 앞 지게꾼은 짐 든 손님 곁에 서성대면서 운반을 청한다. 그때 시골에서는 서울 가면 눈 빼가고 눈감으면 귀 비여 간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나는 어느 정도 무거운 짐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아버님 말씀이 생각난다. 처음 서울에서 제일 갈등이 생긴 것은 동서남북 갈 길을 모르고 전라도 사투리는 내 입을 막고 벙어리를 만들었다.

지금은 교통이 좋아 전라도 말이나 전국 어디 말이나 그렇게 차이가 없으나 그때는 전라도 말은 뚜렷하고 어디서나 싫어하는 말이었다. 더욱이 지역감정이 극해 달했고 전라도사람을 싫어할 때라 더욱 나에게는 갈등을 느끼고 반벙어리 생활을 했는지도 모른다. 1차 안암동 소재 대학을 시골에서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주재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2차로 왕십리소재 대학에 합격연락을 받고 59학번으로 입학했다.

 

4. 대학생활

대학시절에 4.19의거 와 5.16군사혁명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학보로 군복무를 마치고 65년도에 그리던 대학졸업장을 받았다. 59년도 입학해서는 서울시내 고등학교 졸업생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학교를 다니면서 기압도 받고 괄시도 받았다.

그러나 묵묵히 대학생활이라기 보다 고등학생 같이 열심히 공부하고 강의에 충실했다. 나의 전공과는 독일어학점을 잘 받아야하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 배우지 않은 과목이라 종로학원에서 보충 강의를 받았다.

학기가 시작하면서 시위는 연일 계속하고 고학년 선배들의 행동은 거칠어지고 학생들은 공부보다 데모대 속에서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했는데 구호가 어용교수추방, 등록금 인하에서 총장 물러가라는 시위구호였다.

그때 왕십리 소재대학은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많은 청강생을 받아 학교건물을 건축하고 비리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 기억난 교수들은 국어는 시인 박목월선생님이고, 정치학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외무부장관을 지낸 이동원 선생님 이였고, 헌법학은 독일에서 공부하고 온 갈봉근 선생님으로 기억이 남아있다. 박 선생님은 원효로 에서 같은 동래 살았기 때문에 간혹 버스나 전차에서 만나기도 했다. 선생님은 머리를 짧게 하시고 책 한권을 손에 들거나 겨드랑에 끼고 다니셨다.

당시 선생께서는 학생들에게 글을 써오게 하여 평가를 자주 했는데 나는 버스표 한 장이라는 제목에 글로 좋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그때 총장 물러가라 면서 면담하려간 학생회 선배 간부들은 성동경찰서에 피신해 있는 총장을 만나기 위해 경찰서까지 침입 서로 밀고 당기다가 2층 밖 계단에서 학생들과 같이 떨어져 팔이 부러지는 불상사가 나기도 했다. 시위를 주로 교내서 하다가 61년도 새 학기부터는 과격해지고 교외로 나가 데모했는데 서울운동장 앞까지 나간 적이 있다. 교수들이 합세 데모할 때 나는 학원에 갔다가 귀가 길에 총소리에 놀라 시멘트로 만든 고정쓰레기통 옆에서 은신했고 총소리와 총알이 내 귀를 스쳐간 것 같았다.

그때 꼼짝없이 쓰레기통 옆에서 총 맞아 죽는 줄 알았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아침에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교통이 두절된 원효로 3가집에서 용산을 지나 남산을 넘어 퇴계로 왕십리까지 걸어서 학교에 갔었다.

군사혁명으로 군인세상이 되였고 학교에서는 R. O. T. C.(학훈단)가 창설 되여 지원하여 훈련을 받다가 먼 통학 거리로 아침 일찍 교련시간 맞추지 못해 포기하고 학보로 단기복무하고 제대한 것이다.

군에 가기 전까지 나는 자취생활, 사돈집, 형 집 등 안정이 안 된 곳에서 하루살이 같은 삶으로 서울서도 학교를 다였다. 원효로 사돈집에 살 때는 어른사돈이 금융조합에 다니시다가 별세하시고 안사돈과 할머니, 고모, 그리고 딸 다섯 있는 집에 어린 아들과 같이 살기도 했다.

형이 외국에 나가고 형수와 사돈처녀들과 같이 산다는 것은 형무소 생활이라고 표현함이 적합할까? 학교에서 강의가 끝나면 집에 들어가기 싫어 교내 나무 밑지나 남산 케이블카 아래 숲속에서 비료 종이 몇 개로 요를 삼아 깔고 누워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밤에 들어가서 옷도 벗는 둥 마는 둥 잠을 청하고 책가방만 들고 집을 나선다.

여름에 사돈처녀들 있는 집에 총각은 정말로 살 곳이 못된다. 견디다 못해 왕십리 학교부근에서 가정교사(알바) 하면서 자취를 하니 마음은 편안하나 연탄불에 밥해먹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백반 집에다 단골로 아침만 먹기로 하고 점심은 적당히 왕십리 철길 다리 위에서 아줌마가 파는 풀빵으로 점심을 때우고 저녁은 일찍 잠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고통스런 계절은 사돈집에서나 여기서나 여름철 이였다.

여름은 풀빵 몇 개로 때우고 잠을 자고 일어나도 해는 중천에 있고 밤이 되지 않는다. 배가 고프면 밤보다 낮이 더 못 견디게 괴로웠다. 배명중학교 학생 가정교사하다 주인아줌마가 집안일은 돌보지 않고 손톱과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밤에 자주 나가고 아저씨와 부부싸움 때문에 오래하지 못하고 몇 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부근에 고향 공화당 국회의원이 할머니와 같은 최 씨 친척 이여서 그 집에서 몸이 불편한 전처 아들과 같이 놀기도 하고 공부도 하기도 했다.

국회의원 아저씨는 나이가 많고 재혼한 부인은 해무청장 할 때 비서실에 있던 타자수로 나이가 적고 미모를 가춘 싸늘한 아줌마였다. 고향부모가 유권자라 그런지 아니면 먼 친척이라 그런지 나에게는 잘하였다.

그 집에 놀려 가면 그 당시 엿장수가 자주 지나가고 집에 들어와서 맥주병이나 고물을 가져갔는데 그때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라 하루벌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말단 공무원 봉급보다는 낫다고 했다.

그 당시 공무원 봉급이 얼마나 적고 생활하기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전공했던 길로 가지 못하고 체신공무원으로 처음 취직하여 새로운 각오로 이젠 봉급을 절약하여 결혼도하고 집도 장만하여 아들 딸 낳아 잘 길러 고생시키지 않고 아버님생각과 달리 대학 보내고 유학도 보내 내가 이루지 못한 교수나 판검사 시키겠다고 다짐하고 조금한 일본주택을사서 신혼 생활하는 형 집 부근인 효창운동장 밑에 방을 얻어서 남동생 둘을 서울로 데려와서 셋이서 자취를 했다.

막내 동생은 중학교, 그 위 동생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시골부모님이 생활비와 학비는 대준다고 하지만 생활비가 부족하여 힘들었다.

취직은 했으나 엿장수 수입만도 못한 말단 체신공무원 봉급은 결혼준비가 되지 않고 30세가 넘은 노총각에다 동생 둘이나 데리고 자취하고 있으니 어느 처녀가 결혼하려고 하겠는가, 집에서는 돈은 주지 않고 나이든 아들 결혼 걱정만 하고 두 여동생 시집보내야 하는데 장가갈 생각도 하지 않은 다고 부모님은 안달이 나셨다. 하루는 아침에는 셋 형제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시들시들했고 약 사로 간 한 동생도 길에서 쓰러져 오지 못하고 누워 있다가 회복 되여 집에 돌아온 적도 있다.

그때 자취방은 부엌도 없이 마당에다 방 아궁이를 만들어 연탄을 넣는데 바람이 불면 방안으로 냄새가 새어 들어오고는 했다. 마르지 않은 연탄을 갈고 잠을 잘 때는 틀림없이 연탄 냄새로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대문 옆방에 세사는 부부가 어린 딸 하나 데리고 살았는데 그 아줌마가 간혹 연탄을 봐주고 계란 한 줄씩 사주던 기억이 지금도 잊어지지 않고 지금이라도 찾아서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보다 은덕을 싸야한다는 모양이다. 그 후 그 집에서 좀 떨어진 용산 경찰서 뒤편으로 이사를 하고 통장도 만들어 저금도 조금씩 하는데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생이 회현동 빵집에서 타교학생들과 패싸움을 하다 한 학생이 앞 이발이 부러졌다

 

5. 형제를 내 몸 같이

 

동생이 남대문서 파출소 백차에 호송되어가면서 집에 들려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보호자에게 알리고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한다고 하면서 먼저 피해자 가족 간 에 화해서류를 첨부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부모가 쉽게 화해 해 주지 않고 돈을 요구하면서 치료비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 힘든 생활이고 공무원 박봉에 시달리는데 치료비가 어디 있으면 줄 돈이 어디 있는 가 별수 없이 형무소 가서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지 생각했다가도 어린것 앞날을 생각하면 앞이 깜깜하고 자기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다음에 사회생활 할 때는 형을 원망하겠지 하고 몇 푼 되지 않은 저금통장을 잡히고 화해 서류를 받아 덕수궁 옆 법원에까지 찾아가서 사건서류 뒤에 첨부시키고 집으로 돌아왔다.

형무소로 넘어가느냐 아니면 석방되느냐 결정은 밤 12시 자정에 넘어서 판결문에 따라 결정되고 석방 시는 통금 해지 전 시간에 귀가 시킨다고 한다. 밤새도록 잠을 설치는데 새벽에 문을 두드린다. 반갑게 맞지 했고 어떻게 통금시간에 왔느냐고 물으니 팔뚝을 내밀면서 석방이란 도장을 보여주는데 남대문 경찰서장이라고 찍어있다. 그 도장만 보이면 검문에서도 통과라고 한다. 그때 저금통장 아까워서 화해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면 소년형무소에서 콩밥을 먹고 호적에는 붉은 줄을 그어져서 평생을 나를 원망했을 것이다.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에게 자퇴서를 쓰기도 했다. 내가 전공한 법학계통으로 가지 못해 후해도 하지만 내가 대학 견학시간에 서대문, 마포, 영등포, 수원. 인천형무소를 다니면서 정치범, 절도범, 소년 범, 여자형무소등 두루 보아서 법이 무섭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쁜 일을 해서 형무소는 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 큰 사건을 무섭게 여겨 무난히 처리한 것 같다.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동요되지 않고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노력했으나 연애를 정열적으로 해도 결혼성립이 안되고 같이 살다가도 결혼식을 못 올리고 헤어진 사람이 많다고 선배들은 말한다. 결혼도 하늘이 정해준 것인 줄 알았다.

 

6. 노총각 결혼

 

그러나 혼자 살라는 운명은 아니었는지 사내에서 여직원 소개로 연애를 하다가 약혼을 했고 1년이 지나서 종로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부산으로 신혼여행 갔다가 남가좌동 처가댁 부근에다 신혼 보금자리를 차리고 살림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남단 지도나 놓고 찾을 수 있는 조약도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대학 졸업하고 직장을 같고 결혼생활은 자취생활에 비하면 행복한 삶이라고 표현이 어떠할까?

그러다가 큰 위기가 왔다. 직장 직원들과 퇴근 때마다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다가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동료 몇 명이 형사에게 붙잡혀가서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 밤을 지나는데 그렇게 지루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 걱정 이였고 결혼한지도 얼마 되지 안돼서 집이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공무원 신분이라고 유치장 안에서 일반사람과 격리시켜 탄 방에 별도 취급해서 그래도 고생을 덜하였다. 다음날 사무실에서 합동 근무하던 정보기관 요원들의 배려로 무사히 풀려 나왔다.

나는 그때 근무하면 모든 일이 끝난 줄 알았는데 직장징계위원회서 1개월간 감봉처분을 받고 광화문소재 직장에서 변두리 개국(광장) 준비직원으로 발령을 받고 1개월간 밤낮 없이 출퇴근도 하지 못하고 먹고 자며 개국준비로 최선을 다해 차질 없이 개통식 날 장관님모시고 주변유지들 초청하여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그때 징계를 받지 않고 사고도 없었다면 주관적으로 최선을 다해 일해보지 못했을 것이고 안이한 생각으로 주는 봉급이나 받고 살아왔을 것이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직원들과 같이 하루 밤을 지내는 고통과 징계로 진급이 누락되고 봉급이 삭감되는 일은 집이나 직장에서 창피를 당함을 잘못을 크게 느끼고 더욱더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계속했지 그렇지 않고 비관하고 이제는 끝이라는 생각으로 불만이나 갖고 있었다면 중도에 사직을 했을 것이다. 항시 사람은 잘못할 수도 있고 큰일을 당하더라도 깊이 반성하고 자신을 채찍질할 때 바로설수 있음을 알았다. 개통식 날 장관표창은 높은 분들이 받고 나는 한 단계 아래 청장표창을 받았다.

신설 국 재 발령을 받고 근무하는데 출퇴근이 멀어서 직장부근에 방을 얻어 살다 이집 저집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집도 사고팔아 더 큰 2층집을 지어 많은 이익을 남기기도 했다. 처가부근에서 살 때 큰딸을 세브란스 병원에서 낳고 둘째딸은 직장부근 한양대 병원에서 셋째아들은 화양동 차채희 산부인과에서 낳았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나아 잘 기르자 라는 국가시책에 따르러 다가 딸만 둘이니 아들을 얻기 위해 임신했는데 자신이 없어 또 딸이라 생각하고 큰 병원 가지 못하고 가까운 산부인과에 간 것 같다.

득남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득남했다는 전화를 받고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속으로는 무척 기다렸지만 막상 득남하고 보니 무덤덤했다. 직장에서는 그때 음성수입이 난무했고 군정의 술 문화는 실패는 없다, 하면 된다는 밀려 부치기 분위기는 계속되어 직장에서도 술 잘하면 일도 잘한다고 술을 잘하는 사람을 칭찬하기도 하고 술자리도 1, 2차로 끝나지 않고 밤새워 마시기도 했다.

그때 직장주변에는 음성수입이 봉급보다 많았고 주, , 도박(잡기)이 성행했으나 나는 술만 마셨지 다른 것은 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못했다. 담배도 대학 때나 군입대하여 화랑담배로 피워보려 했으나 체질이 맞지 않은지 배우지 못했고 춤도 기회가 있었으나 배우려고 노력해도 음악 박자를 모르니 배우지 못했다.

음성수입으로 직장에서 쫓겨난 직원이 많았고 주, , 잡기로 몸을 망치고 가정이 파탄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과음을 하면서도 86킬로그램이 된 몸을 빼기 위해 잠실 4단지에서 잠실대교를 걸어서 출퇴근하고 그 육중한 몸으로 테니스를 배워 직장대회 때 선수로 출전도하고 몸 관리를 꾸준히 해왔었다. 이제 가정도 직장도 안정되니 나이가 드니 입사동기들은 진급하여 과장으로 발령을 받고 오고 직원들이 나보고 저 사람은 대학까지 나와 자리가 좋으니 진급할 생각은 않고 술만 마시고 장기근속에도 전출되지 않고 있다고 비난이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모르고 한 말들이었다. 고생하며 자취생활로 학교 다니던 생각과 집 없이 세 자녀 자라는데 이제 돈을 써가면서 진급해서 무얼 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본심은 공무원은 한번 징계가 있으면 퇴직 때까지 진급이 누락된다고들 했기 때문에 은근히 노력하지 않고 기회만 보다가 언젠가는 사직을 하려고 체면 볼 것 없이 천방지축 근무를 하고 근무가 끝나면 테니스나 치고 끝나면 샤워하고 사무실 앞 가계에서 맥주로 마음을 달래고 했다.

7. 자녀 셋 대학가기 시작.

 

우리 집은 돈 모아 집장만한 것이 꿈이었으나 이제부터는 세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한 노력 이였다.

공부만 잘하면 유학까지도 목표를 세우고 과외를 시켰다. 큰딸은 미대를 보내기 위해 미술학원과 입시학원에 많은 돈을 들었고 대학원을 졸업시켜 유학까지도 생각했었다.

둘째 딸은 수학을 잘해 수학과를 졸업하고 수학과 대학원은 큰 의미가 없다고 컴퓨터를 전공했다. 현 정보화 사회에 잘 선택한 것 같다. 아들 막내는 공부를 하지 않아 지방대학에 갔다.

군대 제대하고 졸업반이다. 군대 가기 전에는 공부하지 않더니 제대하고 복학 후로는 열심히 공부하고 장학금을 두 학기나 받아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고 있다. 옛날 말에 소꼬리보다는 닭 머리가 더 났다고 했다. 서울 꼬리 학생보다 지방 머리학생이 어떠한가? 큰딸 미술대학 보내면서 예능계학과는 돈도 많이 들고 소질도 있어야 가르친다는 것을 알았다.

부유층 자녀가 아니면 할 수 없고 가르친 부모도 졸업 때까지 만신창이 된다. 특히 본인에 노력과 인내가 아니면 해낼 수 없고 고생만 지질 나게 하다가 입선 한번 해보지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된다.

예능계는 주변지원이 필요한 것 같다.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는 거의 불가능하다. 옆에서 챙겨준 사람이 있어야한다. 그러나 수학과는 학비도 절반이 들고 도움 없이도 본인만 열심이하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둘째 딸도 그렇게 공들지 않았는데 장학금도 받아와 부모를 즐겁게 해주고 했다. 예능계 입시 날이 가까워지면 미술학원에서는 새벽2시까지 그림을 그리는데 그 추운 겨울에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대리고 와야 하는데 자가용이 있는 집은 학원 옆에 세워놓고 차안에서 자고 있거나 시간 맞추어다가 오면 되지만 나는 자가용이 없어 지하철 막차로 가서 두 시간 이상 추운 날씨에 밖에서 기다리고 서 있다가 끝나면 택시로 집에 온다.

 

8. 정말 힘든 일은 추운 밤 기다림

 

마포구 홍익대학 앞 서교호텔 반 지하 쓰레기장에서 학원불빛만 바라보고 끝날 때까지 밤12시 지나 쓰레기차가 추어서 은신해 있는 장소에 주차시키고 쓰레길 수거작업 시작하니 별수 없이 냄새와 먼지를 피해 추운 길가로 나가 기다림은 너무 춥고 지루했다. 이것이 정말로 자식 가르친 부모마음인가 생각이 든다. 둘째 딸은 지방에다 혼자 자취방 얻어 주고 돌아서려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식이 무엇인데 이토록 영원한 이별도 안인 눈물이 이렇게 많이도 흐르고 끊길 줄을 모르는지 내 자신도 모를 일이다. 두 딸들은 재수해서 대학에 들어갔고 막내아들은 스파르타 입시학원까지 보내서 삼수시켜 그것도 지방 대학에 보냈다. 친척들은 우리부부보고 자식들에게 너무 유별나다고 들 한다.

부부가 마음이 맞아서 그 입시지옥이라는 7년 세월을 견디어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입시 지옥을 6-7년을 보냈고 그때는 입시경쟁도 치열하여 대수가 높다.

그 후에는 전문대가 많이 생기고 경쟁률도 낮아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세 자녀를 대학을 보내니 주변에서는 부러워하고 거기다가 분양가 보다 많은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넓은 평수 아파트까지 당첨 되여 이사까지 하니 부러워들 했다. 아들은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는데 양평서 훈련을 받고 동두천부근 덕정 탱크부대서 만기제대를 했다.

나는 양평 용문산 부근 훈련소 부대장 초청 받아 100명에 가까운 훈련병들을 모아놓고 부모대표로 교육시키고 표창을 받기도 했다. 정말 조약도에서 한양까지 지루한 인생살이다. 그러나 나의 삶은 순탄치 않고 행복도 잠깐 이제 나는 홀로 자신과 싸워야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진급이 된 이유는 당시 표창과 새마을교육점수가 공무원사회에서 71일자로 재 평정한 것이 나에게 득이 되었고 내 직급 점수를 따라올 직원이 없었다고 한다. 한 자리에 오래 있다고 비난하던 직원들 비난소리가 없어지고 안정 상태에서 근무하는데 이젠 정보기관을 통해 비리를 파 해치고 본인의사 관계없이 강제 발령을 냈고 노른 자리를 내놓고 이웃으로 전출된 것이다.

그곳에서는 실장에서 사무실 차석으로 자리를 옮기니 도저히 근무할 용기가 나지 않고 행정사무도 잘 모르는데다가 간섭하는 사람이 많아 출근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며칠간은 사직서를 써서 주머니에 가지고 다녔고 퇴근시간에는 같지 술 마실 사람이 없으니 퇴근길 소주 한 병을 사가지고 집에 와서 식사 때 반주로 마시기도 했다.

10년이 넘도록 대우만 받다가 한직으로 자리를 옮기니 견디기 힘들였다. 그때도 나는 비관하지 않고 용기를 내고 공무원 한직자리는 갈 곳은 교육뿐 이였다.

 

9. 나의 공무원 한직은 기회

 

그 때 교육은 할 일없는 직원이 가는 것이 아니고 진급하기 위해 가는 직원들이라 미리 교육선배 책을 구해다가 몇 개월간 공부를 미리 해서 가지 않으면 진급도 못하고 낙제하고 회보에 공개하고 교육기간 합숙경비를 개인이 부담하고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7월 삼복더위에 대전 공무원교육원으로 80킬로그램이 넘은 육중한 몸이 지원하여 입소를 했다. 이때는 공화당 정권이 지나가고 민정 당이 창당 되여 정권을 잡았고 민정당원들이 낙하산인사로 요소요소에 차지하고 있고 우리직장도 공무원에서 반관반민으로 공사로 전환 되였고 교육원에도 본부장이 민정 당 원이였고 평가과장도 공군소령 출신이 예편하여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평가과장이 어찌나 지독했는지 학생뿐만 아니라 교직원까지도 주변에 얼씬도 못했다. 평가 때도 다른 교육과정학생 한 줄씩 썩어서 안자 다른 학생 답안지를 보지 못하게 하고 커닝을 하다가 발견 시는 졸업 몇 일 남겨놓고 퇴교를 당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삼복더위에 1개월이란 교육은 삼천 교육에 비할 것이 아니다.

내가 군대 생활을 강원도에서 신병교육중대 훈련을 마치고 조교를 해서 잘 안다. 교육생이 군인 같이 아침에 운동장 아홉 번 반을 도는 것은 더욱더 힘이 들고 정신적 고통은 더했다.

평균 60점 이하는 낙제고 다시 차기에 재교육을 받아야하는 정신적 고통과 우등하지 못하면 승진할 수 없다는 압박감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내 몸은 모기에 약하다 한번 모기에 물리면 곰발이 되여 한참 약을 발라야 낫고 한다. 그리하여 여름휴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교육기간에도 모기와 싸우면서 모기약통을 들고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고생 끝에 85점으로 수료를 했다. 진급하려면 90점은 넘어야하는데 진급은 이제 틀린 것이다. 그래도 낙제를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직장에 복귀했다. 직장에서는 진급하기 위해 평점을 좋게 받기 위해 경쟁자가 많았다. 관리자는 가능하면 같은 직급에서 고참순서와 교육점수가 많은 직원에게 대게 만점을 주게 되어있다.

그리해야 타부서 직원과 대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평점 자는 은근히 경쟁을 붙어 치열했다. 나보다 고참이 한사람 있었으나 몸이 불편하여 교육점수가 없고 다른 직원들은 진급 된지가 얼마 되지 않은 직원들 이여서 내가 만점을 받았다. 때는 80년 초 교육도 진급도 비리가 많은 시기였다.

인사 부서나 진급에 관련된 부서장은 옷을 벗고 구속까지 되고 국장진급에는 적은 아파트 한 채 가격이 들었다는 소문과 돈은 걱정하지 말고 진급만 시켜달라고 부탁하는 직원이 많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만점을 받았지만 교육점수가 좋지 않아 진급은 기대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서울경기지역이 통합되어서 관서장이 한사람이 되고 직원들 발령도 하위직 관리자까지는 서울시내서만 발령하던 인사제도를 확대 실시함으로 서울에서 발령 받고 근무한사람은 한 진급에서 10년이 되도 진급이 안 되고 경기지역이나 지방은 승진 년 수만 되면 승진되고 기한이 되지 않아 승진시킬 직원이 없어 윗분들이 제도를 바꾸어서 실시한 결과 서울에 근무자가 경기지역 티오로 승진하기 때문에 서울지역 고참 5명이 갑작이 198411일자로 승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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