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0. 전곡리에서

 

나는 승진은 했지만 발령지가 38선 지나 한탄강 넘어 전곡 개국 준비 요원으로 나머지는 금촌, 인천, 부평, 백령도 이렇게 5명이였다. 진급 신고하려 기관장 실에서 발령장을 주면서 이참 진급자는 서울에서 오래 근무했고 사명감이 투철한 직원을 뽑아 진급시켰으니 군사 접적지에 가서 열심히 근무하면 후임 승진 자들이 있을 때 순서대로 입성 시킨다고 달랬다. 발령장을 받고 연휴도 쉬지 못하게 전통 문을 내려 보내 연휴 때 전원 발령지에 가서 근무하라는 것이다 특히 전곡 발령자는 개국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사장이 현지에 방문할 예정이라 한다.

그전 공무원 때 진급해서 의정부로 보내줄까 하든 소리에 미쳐서 의정부까지 가서 근무하게 하며 거절했던 생각이 다시 난다. 공무원 때 보다 봉급이 배로 많아지고 퇴직금도 누진제라 많고 직급도 한 계급 올려서 계장은 과장 과장은 국장이라 했다. 이렇게 공무원에 비하면 대우가 좋아 졌고 학자금도 공무원은 무이자 상환융자지만 공사는 전액지원 해주니 별수 없이 부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임할 때는 계장님 하더니 6개월 후는 경기지역은 편제가 과장으로 됐다고 과장칭호가 붙고 군사 접적 지역은 가점과 수당도 있어 울고 발령 받고 웃으면서 근무했다. 그때가 마치 이산가족 상봉 때라 북한에 대한 국민들에 불안은 더했고 만일 접적지역에서 근무하다가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이산가족 되겠다고 서울에서 근무하다

온 여직원 부모들은 울고불고 자식들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근무지 관할지역은 연천 방향은 신탄진 지나 경원선 철마는 달리고싶다라고 써놓은 철도종단점이고 백학면 방향은 제2땅굴을 지나 고량 포까지였다. 완전 북한 땅 지척까지였다.

고생 끝에 낙이 있다는 옛말대로 만 2년간 근무하고 사장표창을 받고 다시 입성했다.

고생 끝에 입성 일반인으로 군 접적지역 근무 할 때 초등학교시절 6.25전쟁 감정이 살아지고 나는 북한 인민을 한민족으로 생각했고 왜 동족끼리 3.8선 경계에 높이 철조 막을 쳐놓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했다.

매일같이 북한 땅을 보면서 짚 차로 순회할 때 한마을 학생이 불발탄을 포 사격장에서 주어 집에 온 길에 친구와 둘이서 경원선 철로에서 분해하다가 온몸이 한 점 고기 덩이가 된 큰 사건도 보았다. 어떤 사람은 논밭을 개간하다가 지뢰가 폭발하여 하반신 불구가 되어 일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접적지역은 통금시간이 일몰시간과 오후8시 그리고 12시 지역이 있다고 한다. 이 좋은 땅 개발할 수 없을까 비무장지대를 완전개방 공원화 하면 어떨 가 혼자서 꿈같은 생각도 했었다.

서울 입성 후로는 북한 땅을 보지 않고 접적지역 주민을 만나지 않으니 다 잃어버리고 서울시내 이곳저곳 상부지시에 따라 86 아시아 게임과 88올림픽 경기장 지원을 했고 집도 안정되고 큰딸은 고3 입시생이 되었다.

 

11. 300분의 시간

 

전곡, 도대체 어디쯤일까? 하고 물어 보던 때가 어제 같다. 경원선 열차를 타고 곧 닿겠지 하던 기다림의 끝에 마주친 삼팔선 경계선은 무척이나 생소했었다. 아침 출근열차에서 멍하니 차창 밖을 내다보며 언제나 도착할까하던 낯설던 날들에 익숙해진 건은 이곳이 제1땅굴이 있는 접적지역이기에 공사업무 처리에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경각심이었다. 집 앞 광장전신전화국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야 가까스로 출근 시간에 댈 수 있는 전곡전화국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라 할까?

승진과 동시에 받은 발령이었기에 기쁨도 컸었다. 이사냐, 나만의 고생이냐의 선택이 고민스러워지자 승진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었다. 자녀들의 학교문제를 도외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녀들이 어리기나 한다면 또 다른 고향 삼아 식솔 거느리고 옮겨가기나 하지, 이런 저런 이유로 처음 몇 달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퇴근과 동시에 화살처럼 서울을 향해도 집에 들어가면 밤늦은 아홉시가 넘은 시간이요, 아침엔 다섯

시에 넘어 집을 나서면 만원이 넘는 택시비를 감수하지 않고는 지각이다.

새벽잠 많던 내게서 잠마저 달아났던 수 개 월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시계 벨소리에 잠 깨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젠 나도 전곡전신전화국의 기술과장 자격이 생기나 보다 자칭했었다.

05시에 일어나 이런 저런 하루일정을 정리하고 06시 구의역에서 순환선 지하철을 타면 성수에서 신설동 두 번 환승 하고 여섯시 사십분쯤 성북역에 도착한다.

0655분 출발인 경원선 열차는 이미 앉을 자리가 없지만 앉고자 하면 40분을 먼저 출발해야 한다. 그렇게 매일의 아침은 기록된다. 짧은 시간이나마 숙면의 밤을 가지게 되고부터는 차속에서의 시간이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그 시간이 내게는 하루 일과의 점검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출근과 동시에 작업복을 갈아입고 각 실별 결재와 점검으로 해서 공기주입실 점검 부 이상 유무 확인으로 행정일지사항은 일단 끝이 난다. 이어서 조별 창고, 차량 및 이륜차 점검과 개인장비 관리상태 점검을 하면 현장요원들의 일일 출동준비를 마감해주게 된다.

곧이어 전일의 작업사항과 금일의 작업계획을 보고 받고, 검토 협의하면서 출동지시가 끝난다. 이렇게 아침은 하루의 전체만큼이나 비중이 크다.

이런 바쁨의 시작을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 속에 지내 보내던 수개월과 지금의 나와의 차이는 글쎄, 전혀 다른 사람이랄까?

습관은 성격을 만들고 성격은 곧 인격을 형성한다고 했던가? 아침 05시와 저녁 9시 사이의 생활과 300분의 출퇴근 시간 속에 암산하는 나의 습관이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주고, 그런 능력은 내게 근면의 작은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주제넘은 테니스 회 회장까지도 맡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렇게도 지겹던 서울과 전곡을 휴일도 마다 않고 오갈 수 있게 된 것이 테니스 때문인지, 습관으로 생긴 직장 애 인지는 모른다. 다만 축복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300분에 시간이 하루계획이 착오 없이 이행되어 하루의 결산으로 이어질 때 신난다는 표현이 어울릴게다. 걸어서 오가던 수년의 좋았음과 5시간이상의 사색의 즐거움을 저울질할 수 없다. 다만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어진 여건을 사랑할 때 마음의 건강에 덧붙여 건전한 신체라는 부상이 온다는 평범한 진리.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국전기통신공사직원이 그렇게 기쁘고 자랑스럽고 행복했다.

(한통지 85‘ 5월 전곡 국에서)

 

12. 국산교환기 TDX-1를 배웁시다

 

국산 개발품 전전자교환기(TDX-1)를 설치하기 위해 위치 선정과 대지 구입을 완료하고 건축이 시작되던 작년 831TDX-1 자제운반 차량이 국 앞에 도착하여 자재인수를 요청한다. 공사업체인 금성반도체 자재 담당과장이 서류를 가져와 당일까지 인수가 되지 않으면 전곡 국에 자재납품 지연책임이 있다면서 물품관리관의 확인날인을 요구한다. 서류나 자재인수가 문제가 아니라 분기국사는 건축 중이고 비좁은 기존청사에 8톤 트럭 세대분의 TDX=1부품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TDX-1제품은 국산전전자교환기 정밀 부품이다. 운반이나 관리를 조심하지 않으면 파괴나 손상이 많다고 하여 주요 부품은 청사 내 복도로, 그 외 부품은 옥외창고나 차고에 인수하기로 했다. 내용물을 몰라 수량이나 부품자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수량파악이 안되고 내용 부품이 의심스러웠으나 공사업체인 금성반도체를 믿고 자재인수를 완료했다.

곧 이어 금성반도체 시설요원들과 8개월간의 연구원 교육을 이수한 우리 통신공사 직원 2명이 감독으로 차출되어 왔고 하드웨어 공사부터 시작하여 모국 공사를 마치고 분기 국사 공사가 착수되었을 때 모국과 분국 공사요원들의 원활한 공사를 돕기 위하여 폐품으로 반납된 자석식 전화기 5대를 재조립하여 모국과 분기국사를 멀티 풀로 접속해서 신속한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현장요원에게 긴급 가설 지시를 했다. 그 동안 공사 진행 도중에 백학 국 중계케이블이 임진강 수저에서 접속개소연결공사가 조인트 되지 않아 업체의 부주의로 사고가 발생했으며 맨홀 내에 CR중계기 함체 바-킹을 잘 맞추지 않아 습기가 스며들었고 옥외 L/C 절체 반은 공법에 위배된 공사를 실시하여 신규 공사 짬 바 구성이 어려워 재시공토록 하였으며 전력시설의 접지불량 및 정류기 장치의 출력 불평 형 등 부대업무의 어려운 공사가 많았으나 공사는 어느 전도 궤도에 올랐다.

정리단계에 TDX-1분기국사에 기계시험 반송 전력등 각 실 근무자를 배치 점검 계획을 세워 2주간 관내출장 조치하여 운용요원과 공사요원의 간담회를 개최하여 문제점을 사전노출 협의토록 하였다. 낯 설은 접적지역 전곡 국에서 TDX-1공사요원들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계획된 시간 내에 차질 없이 끝낼 수 있도록 협조를 해야 하는 임무가 복잡하고 힘이 든다.

운용요원이 전방지역에서 공사 직원에게 무관심하여 공사가 지연됐다는 말이 업체 상부나 우리 상부인 지사나 사업단에 보고되는 일이 없도록 신경을 써 왔으나 임진강을 지나는 백학 분기국사는 민통선 지역에 위치하여 출입 통제를 받음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성심 성의껏 헌병 초소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임진강 넘어 헌병 초소나 중간 민정 경찰초소는 생각했던 만큼 쉽지 않았다. 항상 긴장된 마음으로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군인의 기본정신은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의 기본업무를 미뤄놓고 공사업체 차량의 안내원으로 앞장섰으며 공사 원을 고장수리 긴급 복구요원이란 구실로 출입시키기도 했다. 출입 통제로 인하여 타국보다 공사가 지연됐다고 보고됐을 때 자국에서 출입관계 하나 해결 못하느냐고 하는 전화를 받을 적마다 이곳 실정을 모르고 하는 말에 가슴이 무너질 듯 답답했었다.

이렇게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설 때 TDX-1교육 이수 생 10명이 파견되었다. 20일 동안 모국에서 금성반도체 직원과 함께 TDX-1에 대한 실무교육과 운영방법을 숙지하도록 하였으나 막상 배치를 하려하니 쉽지 않았다.

TDX-1요원들 간에 서로의 실력을 과시하는 태도도 없지 않아 있었고 백학 분기국사는 모국에서도 약 20km나 떨어져 출퇴근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배치 전에 설문조사를 통하여 이사가 가능한 직원 2명을 백학 분기국사에 우선 배치하고 무인국사에 4, 각 분기국사에 2명씩 115일자로 발령 조치하였다. 좀 섭섭해 하는 직원도 있었으나 각 분기국사에 2층 숙직 방이 부여되어 살림까지 할 수 있어 직원들이 별 어려움 없이 오순도순 지낼 수 있게 됐다.

한편 우리 공사 사장님을 위시하여 금성반도체 사장님, TDX-1사업단장님과 연구 팀 등 여러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았다. 누구나 방문할 때마다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시설 현황에서부터 공사 진도와 문제점 파악, 건의사항, 분기국사의 안내등과 각 실 청소와 정리정돈, 직원 복장 상태까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기억에 남았던 일은 TDX-1사업단장님께서 약 4시간동안 분기국사를 순회하며 TDX-1설치과정에서부터 건물에 대한 취약점등을 지적함에 있어 실질적이면서도 타당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공법이나 용어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TDX-1 직장교재를 몇 번씩 탐독하여 실력을 쌓기도 하였다.

그 동안 기존 인력이 TDX-1요원 때문에 사기가 떨어진다는 여론도 있었고 소외감을 느낀 적도 있었으나 서로 협력할 것을 강조하고 기계실 요원이나 전자 실 요원 간에 인화 단결하여 TDX-1를 배우는 자세로 노력할 것을 기술과 주간결산 때마다 당부하였다. 또한 민통선 지역 출입 통제 구역의 안내원 임무는 처음에는 어려웠으나 여러 번 아내를 되풀이하면서 익숙해졌고 수 십 차례 안내하다보니 몇 개월간의 교육을 이수한 것보다 더 자세히

TDX교환기를 알게 되었다. 어느 덧 설치가 끝나 발신음이 들리고 벨소리를 들으면서 이젠 교환기로서 제 구실을 하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드니 감개무량했다. 우리나라 최초기술진이 전전자 교환기를 연구 개발하여 국내는 물론 국제통화도 지장 없이 통화가 가능하며 각종 통신 정보 처리능력은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하여 하나의 가치를 지닌 작품이 되었다. 앞으로 교환기의 중추가TDX-1을 설치완료하고 성대한 기념행사를 끝내면서 자랑과 긍지를 가지고 내 경력의 한 페이지에 남긴다.

 

(한통지86‘4월 전곡)

 

교환기의 발달을 보면 다음과 같다

최초의 교환기는 1877년 미국의 보스턴에서 사용된 것으로 자석식이었다. 뒤에 공전식으로 바뀌기는 하였으나 수동식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89년에 미국의 A.B. 스트로저가 자동교환기에 대한 발명특허를 얻고 이를 개량하여 92년부터 스트로저 자동교환기가 사용되었다. 이때의 교환상식은 단단(step by step)방식으로, 구조상 접점수가 제한된 까닭에 대용량의 교환은 불가능하였다.1920년 이런 결점을 보완하여 수웨덴에서 크로스바자동교환기가 고안되었고 이후로 여러 가지의 자동교환기도 등장하였다. 자동교환기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는 트랜지스터 발명과 IC(집적회로)의 개발에 의한 것이었다. 즉 자동교환기의 두뇌부분인 계전기를 트랜지스터와 IC로 바꿈으로써 컴퓨터를 교환기에 도입하였는데, 58년 벨연구소에서 발명한 축적프로그램방식의 전자교환기가 그것이다. 이는 입자 변경 등의 관리기능이 데이터 입력만으로 가능하고 프로그램 변경을 통해 교환기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할 수 있는 것으로 종전보다 훨씬 경제적이었다. 이후 데이터통신의 보편화와 교환. 전송 기술의 디지털화로 종합통신인 정보통신이 급속히 보급되자 전전자교환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음성뿐 아니라 문자, 도형, 그림 등의 정보를 디지털 신호화하여 전송할 수 있는 것이었다. 최초의 전전자교환기는 프랑스 알카텔사가 70년대에 개발한 E10A이다. 5년 뒤 스웨덴의 에릭슨사가 AXE-10을 상품화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중앙 집중 제어 방식으로 사고 시 전체기능이 마비되는 단점을 가졌다. 80년대 들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급격한 발전으로 분산제어방식으로의 전환이 가능해져 이러한 문제가 해소되었다.

자석식 교환기는 전화기의 발명으로 음성신호를 전기신호로 변환시켜 먼 거리까지 전송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요구되는 것이 어떻게 하면 여러 곳과 값이 싸게 통화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교환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처음으로 개발된 것이 교환원에 의해 수동으로 전화를 연결 시켜주는 수동교환기였다.

세계 최초의 교환기는 1878128일 미국의 코네티컷 주 뉴해븐(New Heaven)시에 설치되었다. 수용가입자 수는 21 가입자이었으며, 이후 가입자의 증가에 따른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복식교환기가 1887년 미국에서 개발되었다.

1902320일 서울 인천사이에 通信院에서 경영하는 전화가 개통됨으로 우리나라의 공중 통신용 전화사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교환기는 자석식 100회선 단식교환기와 소형 벽걸이형의 2종류였으며, 일제 강탈시 총 12대가 있었다.

자석식 100 회선용 교환기의 제조회사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스웨덴의 제품이거나 혹은 일본이 수입해서 개량한 미국의 웨스턴 전기회사 제품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석식교환기는 전화통화용 전류의 공급을 위해 가입자별로 축전지를 달아야 하므로 관리에 애로사항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시키기 위하여 공전식 교환 장치가 개발되었다.

공전식 교환기는 공전식 교환기는 자석식교환기가 갖고 있는 전원장치의 전압변동 및 관리상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가입자가 개별적으로 비치하던 축전지를 없애고, 교환국에 집중시켜 모든 가입자가 필요로 하는 전원을 교환국에서 공급하는 방식으로 개발된 교환기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전식 교환기가 설치된 곳은 지금의 중앙우체국 부근인 경성우편국으로, 19086월 교환대 4대 규모로 통되었다. 1911년 부산국에 설치된 것을 비롯하여 1921년 용산분국, 1923년 광화문 분국 등에 개통되었으며. 1930년대에 일제는 100 회선용 단식교환기를 개조하여 소형 복식교환기로 개발하기도 하였다.

공전식 교환기는 자석식에 비하여 상당한 편리함을 주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수동식교환기로는 대량의 가입자를 수용할 수 없었고, 번거롭게 교환원의 손을 일일이 거쳐야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자동식 교환기는 자동식 교환기란 가입자가 다이얼을 이용해 직접 자동교환기를 조작하여 착신가입자를 호출하여 통화를 하는 교환기로써, 교환원을 거칠 필요가 없으며, 공전식에 비해 통화품질이 좋고, 수용능력이 크게 향상되는 장점을 갖고 있다.

1889년 미국의 스트로져(A.B. Strowger)에 의해 최초로 발명된 자동식

교환기는 수평 및 수직운동을 통해 가입자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반원통모양의 스위치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ST교환기가 최초로 설치, 운용된

곳은 1892년 미국의 시카고 근처였으며, 규모는 100 석으로, 여든 개의 선택스위치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3년에는 10,000 가입자 용량의 스트로져 교환기가 실용화되었고, 1910년에는 미국의 131교환국 200,000 가입자가 자동교환기에 수용되었다. 그 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에서도 ST교환기를 그대로 도입하거나 일부 개량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국내 최초로 자동교환기가 개통된 것은 19353월 나진우편국의 SH(Siemens Halske) 교환기로 400회선 규모였다.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적 요충지인 나진항에 국내 최초의 자동식 교환기를 설치한 것이다. 이어 193510월 경성중앙전화국에 ST교환기 6,000회선, 11월에 청진국 1,000 회선이 설치되었다.

1959년 새로운 방식의 자동식교환기 도입을 위한 국제입찰에서 독일 지멘스의 EMD 교환기가 낙찰되어 우리나라에 EMD 자동교환기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EMD 교환기는 용산전화국에서 1960952,000회선 규모로 최초 개통되었으며, 19657월에는 최초의 국산화된 EMD 교환기 5,000 회선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산화된 EMD 교환기는 대도시에 주로 설치되었으며, ST 교환기는 중소도시에 설치되었는데, 이러한 이원화 현상은 반전자교환기가 도입되기 시작한 1977년까지 계속되었다.

반전자 교환기는 트랜지스터의 발명과 컴퓨터의 등장은 교환기개발에 혁신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기계식 교환기의 제어부분이 컴퓨터로 대체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6년 미국에서 아날로그 통화계를 컴퓨터에 축적된 프로그램이 제어하는 반전자교환기 NO.1 ESS가 미국에서 실용화되었고, 컴퓨터의 H/W를 개선하여 1970년대엔 NO.1A ESS로 발전되었다.

우리나라의 전화시설은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된 첫해인 1962년 말 17만 회선에 불과하였으며 그중 약 50%가 자동식이었다. 그러나 4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계획기간 중 급속한 경제성장과 산업의 발달로 국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전화에 따른 수요는 급증하였다. 이에 따라 EMDST방식의 자동식 교환시설로는 수요를 충족 시길 수 없게 되어 반전자교환기의 도입과 개발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19779월 도입기종으로 벨기에의 M10CN이 결정되었고, 드디어 197912월에 2만 회선이 영동. 당산전화국에서 각각 개통되었다. 이어서 반전자교환기의 경쟁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제2기종을 도입하기로 하고 국제 입찰을 실시하여 미국 WE사의 NO.1A ESS가결정되었다.

이후 반전자교환기의 설치가 지속되어 1981년에 모두 18만 회선이 개통되는 등, 반전자교환기를 개통한지 4년만인 1983년 말 현재 100만회선의 반전자교환기가 개통되어 우리나라 전체 전화회선 수 533만회선의 22.5%가 반전자교환기로 구성되었다.

전전자 교환기는 반전자 교환기의 개발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이 통화로 계의 디지털화로서 프랑스에서 1970년에 세계최초로 개발을 완료하여 전전자 교환기 E-10에 적용, 설치되었다. 또한 미국에서도 시내교환기용 전전자 교환기와 대형 시외교환기인 N0.4 ESS1976년 실용화시켰으며, 캐나다에서도 전전자 교환기의 개발에 성공하여 실용화시켰다.

우리나라에는 1983년 최초로 농어촌용 중소형 전전자교환기인 AXE-10이 도입되어 TDX-1이 개발될 때까지 75만회선 가량 설치되었으며, 또한 같은 해 혜화전화국에 시외자동교환시스템인 No4. ESS교환기가 설치되어 1987년 전국광역자동화완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밖에 1989년 대도시용 전전자교환기로 5ESSS1240을 서울 중앙전화국과 부산 장림전화국에 각각 설치 운용하였다. 한편 1976년부터 국산 전전자교환기의 개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끝에, 1977년 전담부서인 한국통신기술연구소가 발족되면서 본격적인 개발계획의 수립과 더불어 연구개발이 시작되었다. 1,2차 시험기의 개발을 기반으로 1981년도에 3차 시험기가 제작되어 19827월 용인시 송정우체국에 362가입자를 수용하여 시험운용하면서 이름을 TDX-1X로 결정하였으며, 이때부터 TDX로 불어지게 되었다. TDX-1X의 운용분석결과를 토대로 1983년 농어촌용 교환기로 실용화할 1만회선 용랑의 TDX-1의 설계제작업무가 수행되었으며, 드디어 1984년 서대전전화국과 유성분국에서 인증시험을 실시하여 상용화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생산, 농어촌지역에 공급하게 되었다. 이후 TDX-1의 운영상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농어촌용인 TDX-1A(1988), 중소도시형 전전자교환기인 TDX-1B(1989), 대도시용인 TDX-10(1991)이 연속해서 개발, 보급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199711월에는 국산 전전자 TDX교환기의 시설수가 1천만 회선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전곡전화국에서 처음 설치하여 개통하고 우리나라 교환기 발달사에 기여했다.)

전화적체를 해소하고, 국민의 정보통신 욕구를 충족시키며, 우리나라 전자교환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려 대외경쟁력 제고에 일조해온 TDX 교환기는 현재 전체 교환시설 중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육박하고 있으며, 1999년에는 차세대 주력기종으로 사용하게 될 TDX-100 교환기가 개발에 성공, 서울 가좌전화국에서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TDX-100교환기는 유선교환기·무선교환기·ISDN용 교환기 등의 기능을 하나로 통합, 비용과 공간을 크게 줄였으며. 특히 수용능력이 일반 가입자 20만명, 개인 휴대통신 등의 이동통신가입자 50만명 등 최대 70만명에 달해 성능 및 용량 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낸 최첨단 교환기이다.

 

13. 늦었지만 시작이 반

 

흔히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을 한다. 늦었다고 생각되는 때 시작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늦었다고 생각될 때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처음부터 나의 직장 생활을 디시 생각하면 체신부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한국통신공사까지 20년 나보다 앞서신 많은 선배들의 어려웠던 이야기들과 또 내가 겼었던 어려움이 발전된 통신시설을 운용하는 후배직원에겐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20년 전 나의 최초 발령지는 통제중계소와 서울의 중앙에 위치한 광화문 전화국이었다. 그곳에서 중요회선을 담당하는 동안 상하 조직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행동 등, 여기에 기록조차 못할 부끄러운 일도 많이 있었고 무질서한 사생활 때문에 다른 동료들보다 승진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꾸지람과 조언을 해주시는 상관도 계셨지만 쉽게 고쳐지지 못했다.

중징계를 받고 광장전화국으로 전출발령을 받게 되었다. 지금은 서울 같은 환경에 위치해서 번듯한 곳이지만, 그 당시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서 있었고 개국이 되지 않은 상태여서 개국준비로 직원들은 퇴근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 역시 약 2개월간 관내의 자석식 전화기를 자동식으로 방식변경하기 위하여 지난 잘못을 뉘우친다는 마음자세로 전 힘을 다하여 맡은 업무를 긍정적으로 처리 장관표창을 받았다. 징계나 받던 나로서는 심기일전할 기회였으나 개국이 되고 업무가 정상수중으로 되자 지난날의 무질서한 생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일한 생활에 몸은 비대해져만 갔다. 173cm에 몸무게가 86kg이 넘게 된 것이다. 표준체중에서 10kg이 초과되니 어찌 정신인들 건강해질 수 있겠는가?

건강한 몸에서 건전한 정신이 있다는 생각에 다시 건강한 육체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잠실 주공아파트 4단지인 집에서 잠실대교를 건너 광장전화국까지 4km의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을 했고 기본도 모르던 테니스를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배웠다.

겨울철에는 테니스를 친 후 냉수로 샤워를 하며 체중을 줄이는 데 노력하였다. 그 결과 체중을 76Kg으로 줄이는데 성공하였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전화국의 업무가 공사로 전환된다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안일한 생각으로 10년 이상을 한자리에서 근무하던 나는 공사로 전환된다는 것이 불안해 당황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공사가 되면 통신에 대한 전문지식 없이는 업무처리에 많은 지장이 있을 것이고 담당 업무를 감당하기 어려워 사직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

그 때문에 한 손에는 영어책 다름 한 손에는 전공 책을 갖고 다니며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1단계 변신을 해야만 했다. 전에는 교육이라면 받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하고는 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82년 정신교육과 직무교육을 받으러 대전의 연수원에 입교하였다. 우등하지 못하면 승진도 할 수 없다는 생각과 여기서 뒤떨어지면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압박감에 7월의 더위와 싸우며 4주 동안 집에도 가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러다 보니 굳어있던 몸과 마음이 조금씩 풀리게 되었고 공사전환에 대한 두려움도 가시게 되었다.

교육 수료 후 피곤해진 몸이 풀리기도 전에 10년 넘게 근무하다가 사무실에 안자서 근무하려니 나이 먹은 현장출신인 나로서는 업무처리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교육을 받아 몸과 마음이 변하지 않았더라면 참기 힘이 들었을 것이었다.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공사로 전환되던 때부터 발행된 규정집과 공법 책들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주변의 동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위하여 많은 신경을 써야했다.

연말이 되니 청소를 하시던 아주머니가 나오지 않을 때는 남보다 일찍 출근하여 사무실 청소를 했다. 젊은 직원들이 일찍 출근하여 청소하는 나를 보기가 미안했던지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출근할 때까지 순서를 정하여 청소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16개월을 생활하다보니, 전의 오만하고 타협을 모르던 나의 낡은 습관들이 하나씩 껍질이 벗겨지며 새로운 내가 되는 것 같았다. 알게 모르게 2단계 변신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하던 담당근무도 아닌 지역도 다른 통신 시설 전 분야를 책임져야 하는 기술과장이란 직책은 소통관리 분야만을 처리해 온 나로서는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업무이외의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직원들의 조언과 관련 공법책자와 씨름한 결과, 6개월 후에는 업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고 1년 후에는 경험과 관리기법이 생겨 나의 주관으로 계획을 세워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차기 승진 자가 올 때까지 불평 없이 직원과 열심히 근무를 하려고 생각하며 차기 승진 자를 기다리고 있던 중 난데없이 본사에서 국산 전전자 교환기인 TDX-1기종을 이곳에 최초로 설치 운용할 방침이니,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눈앞이 캄캄해 지는 것 같았다.

전자교환기의 용어도 모르는 상황에 전자교환기, 그것도 최초로 개발한 TDX-1이라니. 어떻게 개통시키며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관로시설의 확충, 가공케이블 지하화, 나선 로 대체, 지뢰매설 지역에서의 선로시설 유지보수, 거기에 TDX-1개통준비를 해야 했다.

갖은 고생 끝에 개통을 완료하고, 전화국 앞들에서 지사장님, 본부장님과 지역의 군수, 경찰서장등 많은 주민 참석한 개통식에서 사장표창을 받던 일은 20년 전화국 생활 중에서 가장 보람이 있었다.

현대사회는 수동적인 사람보다는 능동적인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계발로 자기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사회가 변하면 그에 맞게 사람도 변해야 한다. 할 수 없다는 이유의 설명보다는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 통신공사도 사업 본부장 제도로 조직이 변하였고 앞으로는 민영화를 추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체신부에서 공사로 전환되던 때의 걱정들이 민영화가 이루어질 때 또 다른 걱정으로 나오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지나간 경험을 토대로 나는 또 변신할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여 주변 환경이나 시설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경험과 적응할 수 있는 실력을 쌓아가려 한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다. 라는 말과 같이 썩는 고인 물이 되지 않고 썩지 않는 흐르는 물이 되어야 한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기에 나는 흐르고 구를 것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이고, '시작은 곧 반'이기 때문이다.(한통지86‘4)

 

14. 한분수 (월간 '뷰티라이프')작가의 선평

 

늦었지만 시작이 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한 이 글은 현장출신으로서도 열심히 규정집과 공법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자세가 귀감이 될 만하다.

새 국산 전전자 교환기인 TDX-1기종을 최초로 설치하고 운영할 때 느꼈던 일들이 현실감 있게 잘 표현됐다. 또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고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다'라는 말을 적절히 인용하는 등, 명언을 적재적소에 쓸 줄 아는 솜씨도 돋보인다.

시간 틈틈이 자주 글을 써보면 더욱 더 세련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15. 자연스러운 O. J. T교육장

 

전람요원(전화국 지하시설 유지보수요원) 중에는 기량의 차이가 나는 사람이 많다. 많은 요원 중에서 일을 주관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직원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지금은 더욱이나 국가유공자(원호대상자 용어로 경고) 자녀들이 전람요원으로 입사되기 때문에 기량의 격차가 심할 수밖에 없다. 지방의 전곡전화국에서 근무할 때도 4명의 전람요원이 두 사람이나 되어 지하시설 유지 보수에 어려움을 겪었었다.

서울 시내 전람요원들도 오랜 경력을 가진 고참요원은 기량이 우월하나 처음 발령을 받은 직원이나 일에 적극성이 없는 직원은 미숙하기만 하다. 특히 건설 국에서 어렵게 기량을 연마한 직원은 기량이 대단히 우수 하다. 이곳에도 국가유공자 자녀 신임사원들은 특별히 교육을 받은 바도 없고 일에 적극성도 없어 기량 향상은 어렵기만 하다. 또 다른 이유는 모든 시설이 사용 중이기 대문에 기량 자가 아니면 심선 접속이나 연공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일 년을 넘기는 직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임 발령자는 기량을 숙달시키기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기량 자가 많은 국은 전람요원이 일을 하기가 쉽지만 기량 자가 적은 국은 모든 일을 중간 관리자의 주관대로 하지 못하고 몇몇 기량 자는 직원들의 뜻에 따라 일이 처리되기 때문에 전람 일을 잘 모르는 관리자는 힘없는 관리자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우선 힘 있는 관리자가 되려면 미숙한 기량 자를 기량자로 향상시키는 데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맨 투맨 교육을 하기 위하여 장소를 물색하였으나 청사가 워낙 비좁아서 O. J. T교육장을 설치할 곳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 끝에 통신구와 동도 활 입 공사가 끝난 연말에 동도 환경미화를 시작하던 중 통신구 입구에 우리 전람과 O. J. T교육장을 설치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어두침침한 동도 입구에 대형 형광등 두개를 구입하여 설치하고 허술한 책상을 앞에 놓으니 마치 교탁 같고 강의실 같은 느낌을 주는 교육장으로 변모하였다.

마지막으로 기계실에서 시설카드 함으로 사용하던 대형 카드 함을 개조하여 페인트칠을 한 다음 전람에서 사용하는 자재 및 공기구를 진열해 놓고 사용용도를 앞면에 기록하도록 하였으며 자재를 구하여 케이블 접속 대와 연공 대를 만들었다. 이런 시설을 해놓으니까 두 사람이 한조로 편성된 두개조가 심선 접속도 하고 연공도 할 수 있는 좋은 O. J. T교육장이 되었다.

이젠 영하의 강추위나 눈비가 많이 와서 현장 작업이 어려울 때는 이곳 교육 장 내서 전람 업무의 기본이 되는 심선 접속이나 연공 교육을 조장들로부터 맨 투맨 식으로 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다. 시간이 남는 기량 미숙자들도 제각기 연습에 열중할 수도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10p, 50p, 100p등으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심선 접속에 재미를 내었고 이제는 기량미숙자들이 눈비가 내려서 현장출동을 못할 때에는 아침 일찍이 모여 지하식당에서 100원짜리 커피내기 접속경기 대회도 하고 점심시간이 될 때에는 800원짜리 점심내기도 하면서 자발적으로 기량 향상에 주력하는 걸 볼 수 있다.

이제 우리 국의 전람과 O. J. T교육은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 행해지고 있으며 전에는 눈비가 올 때 전람요원 실에서 장비나 다듬고 잡지를 보며 잡담을 하면서 시험실에서 고장 통보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안일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났다.

현장에 나가지 못하는 날은 아침 830분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동도 O. J. T교육장에 집합을 하여 개인용 보관함 정리 및 청소부터 시작을 한다.

항상 냄새나는 맨홀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실내가 더러워지고 어수선해지기가 쉽기에 좋은 분위기와 깨끗한 실내를 만들기 위하여 각자 화분도 가져다 놓았고 환경 미화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그리하여 청소와 환경정리가 끝나면 O. J. T 교육장에서내기 경쟁하며 기본적인 전람요원 교육으로서도 이겨보겠다는 직장교육을 하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심선 접속도 빨라지고 손재주가 있는 직원들은 선배들도 놀랄 만큼 몰라보게 기량이 달라져 갔다.

안정된 분위기와 옛날에 가졌던 안일한 생각을 다 버리고 건설적인 사고로 미숙자는 기량 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기량 자는 신기술 습득으로 '발전하는 우리 전람'이라는 표어 앞에 매일같이 교육에 임하고 있다.

(한통지 87‘ 3월 청량리)

 

16. 인수 공 작업과 초복 날

 

현장의 전 종사원은 인공 양수작업, 인공 천막설치, 케이블 포설, 시험실과 대조, 또 한편에서는 가입자 대조를 위해 주상(전신주 위)을 오르내린다.

유관굴착공사로 인해 관로 내 케이블고장이 생긴 것이다.

더욱이 고장이 발생한 곳이 동대문구 이문동의 주요기관(X)이 밀접한 부근이고 을지훈련기간중이라 더한층 마음을 조이게 된 복구 작업이었다.

이곳 주요기관의 요원들은 비상전용회선의 고장으로 알고 작업내역을 근심하여 묻다가 가입자회선의 고장임을 확인한 후 돌아가곤 했다.

우천으로 인해 모래 주머니운반 통풍기 작동 등 동료들의 모습은 바쁘다. 담당부장과 조 대리는 친척 초상 당하여 자리에 없었고 요원실의 염 실장은 을지훈련요원으로 파견 중이었다. 또 유지보수 당무자는 대전연수원에서 정신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라서 나 혼자 현장에서 작업지시를 하게 됐다.

현장 요원들과 최선을 다해 빠른 시간 내에 케이블고장을 복구시킬 것을 다짐하면서 교체작업을 시작한 것은 오전 8시경이었다. 정신없이 이리 저리 뛰어 심한 시장기가 느껴져 시계를 언뜻 보니 벌써 점심때가 지나고 있었다. 때는 초복 날. 작업장의 바로 앞에 있는 영양탕식당과 사무실과 연락을 취하기로 정해서 그 집에서 점심을 팔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업인원이 많아 경비가 너무 많이 들것 같아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비지땀을 흘리며 작업에 열중하는 동료들을 보고 마침 초복 날이고 하니 점심을 영양탕으로 들기로 했다. 식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복날이라고 들이닥친 손님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어 우리 20여명의 종사원들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각 조장들과 다시 상의한 끝에 다른 식당에서 찌개백반으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작업의 분위기가 서서히 차분해지고 또 분담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오후 3시경쯤 지부장과 이선철 총무과장이 현장에 찾아왔다. 이들은 이쪽저쪽 인수 공 내에서 작업에 열중하는 요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비 오는데 너무 수고가 많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 홀로 작업을 지시하고 있던 때라 같은 분야의 업무도 아닌데 이렇게 직접 찾아와 격려를 해주는 그 모습에서 얼마나 고마움을 느꼈는지 모른다. 정 지부장은 격려금을 전하면서 음료수라도 사다 마시라고 했다. 성의가 몹시 고마웠지만 성큼 받을 수 없어 이곳 지역조장에게 전달해 주라고 했다.

머리카락처럼 코인 심선을 풀어 제치면서 가입자를 일일이 대조하는 동료들의 얼굴에 맺히는 땀방울을 보면서 영양탕을 대접하지 못한 마음을 괴로워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소나기를 몰고 다니는 먹구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당장 소나기가 쏟아진다면 경사진 산동네에 물이 인수공안으로 덮쳐들어 심선은 엉망이 될 것이 뻔했다.

인공천막을 덮었다 벗겼다하면서 작업에 열중하다보니 주위에는 어느새 어둠에 깔리고 있었다. 장애등을 켜서 인공내로 내려 보낸 후 한참이 지나 연공이 시작한 것은 밤 10시가 훨씬 지났을 때였다.

한 팀은 고장케이블을 철거하고 또 한 팀은 비눗물점검과 공기압력을 쟀다. 결국 장장 13시간의 인수공 내 작업이 완료된 것이다.

작업도구를 챙긴 후 사무실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생각보다 고장케이블을 완벽하게 복구시켰다는 안도감이 앞섰다. 사무실 근처의 단골식당에서 섞어찌개에 소주한잔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서로서로 오늘 하루 수고가 많았다고 정감 어린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 후 늦은 귀가를 서둘렀다. 저편하늘 한구석에 별이 빛나고 있었다.

 

17. 깨끗한 정신 건강한 몸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고 해서 그런지 요즘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심한 운동보다 연로한 사람들은 가벼운 운동이 건강에 좋다고들 한다.

나도 사십 전에는 심한 운동을 했다. 늦게 배운 테니스를 날이 밝기도전에 테니스 코트 장에서 공이 잘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운동을 심하게 하고 허기와 갈증 때문에 구멍가게나 음식점에서 맥주나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곤 했다.

힘든 운동을 늦게까지 하고 피곤한 몸에다 과식 과음으로 가정을 버리고 휴일을 보냈다. 심한운동으로 땀 많이 흘리고 많이 먹고 마시면 노폐물이 제거되어 건강한 체력을 유지할 줄 알고 심한 운동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