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회갑 후 다시 공부 시작

권치남님 2022. 10. 22. 15:23

. 회갑 후 다시 공부 시작

 

노년의 공부시작은 두랸노 서원이다. 두란 노 서원은 셩경(19:8~10) 그 의미가 있다.

 

8절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절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 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 하니라 10절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고 이제부터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관련 학문을 듣는다.

 

성경, 문학, 문예, 철학, 법율 치유와 회복을 위한 안식 성경공부 출애굽, 희년, 생각, 은혜, 지혜와 안식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 바울의 희년선포 사도행전의 새 어법, 영성 성경 연구 설교 제자도, 설교, 사역자의 영성, 현대문화와 안식 한국 문학 작가 순례 문예 창작 (, 수필, 소설) 철학 산책, 시민생활 법률 전체적인 성경공부와 실천행위는 천국에 가는 길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이란 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믿음은 보지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죽어도 살고 죽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그 부활 신앙만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어떠한 인생의 시련과 역경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삶의 추진력이 될 수 있다.노년 긍정적 이해를 기초로 (16: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임금이 쓴 왕관 아닌가요? 노년의 삶 자체가 행복의 면류관입니다.

 

영국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 명예교수인 피터 라슬렛 교수는 제3 인생 기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노년(Aged)란 말 대신에 제3 인생 기(The Third Ag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부모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젖먹이로부터 청소년까지의 제1 인생 기 직업을 갖고 일을 하고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기르는 제2 인생기를 거쳐 은퇴 후 비로소 안정된 자기의 삶을 찾는 시기가 제3 인생기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년기야말로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기이다. 젊어서는 가족 때문에, 직업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공부도 이때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신세대 노인은 인생은 칠십부터 이렇게 노년의 삶 자체가 축복된 삶으로 이해해야 한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남자 건 여자 건 위대한 인물은 고령이 되어 생리적으로는 늙었어도 나이 때문에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그 나이를 발판으로 삼아 어려운 사명을 맡아 훌륭한 공적을 남기고 문학이나 예술의 위대한 작품, 혹은 놀라운 과학적 성과를 만년에 가서 이룩한 사람이 많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완성한 것은 여든이 넘어서이다. 지금도 로마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유명한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을 완성한 것은 미켈란젤로가 70살이 되어서다. 유명한 음악가 베르디, 하이든, 헨델 등은 고희가 넘어서 수많은 명곡들을 작곡하였다. 이렇게 노년기는 열매 맺는 시기이다. 옛날부터 동양에선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60세가 되면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말을 들어도 이해를 잘 한다는 뜻)이라고 했고 서양에서도' 노인현자(賢者) 로 생각했다. 노년도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한 삶임을 인식하고 아름답고 존귀하게 살게 해야할 책임이 있다. 노인은 단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세대는 아니다. 노인은 시간이 저절로 흘러가기를 바라고 있는 세대도 아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그리고 존귀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장년의 인생만을 열심히 살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14계절이 저마다 가치 있고 중요하다. 봄에는 잎이 나고 꽃이 피며 여름에는 무성하게 자라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으며 겨울에는 내년을 위해 준비하고 안식한다. 이렇게 각 계절이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계절도 마찬가지이다. 출생에서 노년가지 우리의 전 생애(Full Life)는 똑같이 중요하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며, 이 전 생애를 창조의 섭리에 따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살아야 한다는 이해를 가져야 한다.

 

(나의 노년에 읽은 책 1. 성서해설 2.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 3. 목사님의 말씀, 어떻게 생각하세요. 4.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5.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6.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자 7. 바울의 인간과 사상 8. 그리스도인의 현실 참여 어떻게 하는 것인가 9.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 노년에 처음 받은 두라 노 강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안식 성경공부(중급반) 두란 노 서원 이상규 목사/한국 문학 작가 순례(시민대학) 시립 대 교수 이문규 교수/요한복음 열린 성경공부 두란 노 서원 박태효 목사/성경속의 인물탐구 세미나 두란 노 서원 권준 목사/ 늙음은 하나님의 은총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진리와 정의에 봉사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고독 속에 혼자 남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늙음을 핑계삼아 자기의 태만함이나 결점을 정당화하려고 엄살부리는 사람들은 늙은이 티가 나서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게 됩니다.

 

. 나의 노년봉사활동체험(봉사자의 기쁨)

 

봉사활동은 영성을 성숙시킨다. 어느 화요일 영락교회 선교관에서 한 정 협 도시체험교육이 있는 날이다. 동숭동 이 집사님과 점심 식사 후 커피 하는 자리에서 청량리 다일공동체 밥 퍼 센터에 내일 수요일에 봉사하로 가자고 간청한다. 청량리다일공동체란 옛날 최일도 목사께서 개척한 천사집이아인가. 그곳은 내가 갈 곳이 안 된 다고 생각했다. 내 머리가 대머리고 독 거 노인이 그런 사람들에게 봉사는 분수가 아니며 아내 생전에 아내 봉사를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생전에 구박했던 곳을 이제 내 자신이 봉사라니 이상하다고 생각도 했다. 하나님 왜 밥 퍼 봉사며 아내 생전 구박한 동원교회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주일학교 교사하다가 세상을 떠나간 후 내가 싫어한 주일학교 교사를 8년간을 봉사하게하고 이젠 밥 퍼 봉사까지 그러나 이 집사님의 친절과 간절한 간청을 거역하기 힘이 들어 승낙을 했다. 승낙 후 혼자 그곳을 찾아가기가 챙 피해 나만 처다 본 것 같아 용두동교회 김 장로님께 부탁하여 같이 갔다. 가서보니 생각했던 노숙자들이 아니고 깨끗한 옷차림들이였고 장소도 노상이 아니고 100명 정도 수용가능한 식당이다. 나는 첫날 김 장로님과 한조가 돼 어 약700 그릇정도 국 퍼 봉사를 했고 매월1회 동숭동교회 봉사단 권사님과 집사님들 그리고 학생 대기업사원들과 같이 밥 퍼 봉사를 하고 있다. 봉사는 노후 나의 정신을 젊게 한다.

 

 히브리인 정착 도시체험 봉사

 

나의 민족 복음화 꿈은 1959년 한양대 강당에서 김활란박사가 미국선교사 통역 중에 민족 복음화 꿈을 줬다. 한국에 정착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해서 성공한 모델이 곧 북한 선교의 장ㆍ단기 선교방법이 될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는 처음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변화되어 가며 적응하는 모든 과정과 심리 상태와, 사회적응과 인식의 문제들을 북한선교의 귀한 자료로 여길 뿐만 아니라, 이들이 북한 선교의 선봉에서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것이 북한 선교를 바르게 이끌어가는 핵심적 과제고 민족 복음화 첫 거름이라고 생각하고 봉사를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 기독교의 각종 의식행사가 마치 북한의 주체사상과 다를 것이 없다고 인식한다. 설교나 성경공부가 사상학습으로, 하나님 찬양이 김일성 부자 찬양으로, 회개가 자아비판으로, 신자가되는 것은 마치 당원이 되는 것처럼, 여전도회는 여성동맹으로 비춰지고, 남 선교는 남성 직능동맹, 10계명은 유일사상 10대 원칙 등으로 기독교에 대하여 스트레스와 불신이 쌓여간다는 것은 여러 연구조사에서 잘 알려진 바이다. 새터민들이 남한 사회와 교회에 대하여 온전히 긍정적인 생각과 삶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이들과 인격적인 나눔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실제적인 프로그램(히브리인 상담, 직업알선, 의형제 맺기, 가정자매결연 등)의 개발과 적용이 필요하다. 북한 체제에 익숙한 이들이 북한선교의 주체로 활동할 경우, 북한선교는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인 외에도 북한의 지하 교회들의 생존 자구력을 최대한으로 배양하여 저들을 통한 자체의 변혁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고무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성도들은 온갖 고난의 과정을 통해 북한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산해야 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 선교의 주체는 외부인이 아니라 북한 성도임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북한에서는 카타콤의 성도들이 육체의 생명을 빼앗아갈 수 있는 자를 두려워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영적전쟁의 최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고군분투 하고 있다. 저들에 의해 북한 선교는 이미 북한과 중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북한 성도들을 잊지 않고 더욱 깨어 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히브리인은 유브라대 강을 건너온 사람 진행 중)

 

201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라이베리아 여성 평화운동가 리머 보위(39)의 소감나를 행동하게 한 건 신앙이었다.”고통과 슬픔에 빠져 있던 어느 날 그녀는 꿈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여성들을 모아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내용이었다.

 

. 나는 무관심 죄인이다.

 

금년 추석연휴에는 3일기도의 영적 파워를 읽고 독후감이나 써서 제출하기로 생각을 가졌다. 연휴가 되기 전에 책을 구입해야겠다고 99일 토요일 일찍 양재동 두란노 서원을 찾았더니 휴무라고 문에 써 놓았다.

 

힘이 빠져 포기할까 하다가 다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종로 3가역에서 내려 한 정거장을 걸어서 종각역 부근 종로서점 이층 기독교서점에서 다시 보는 세상과 3일기도의 영적 파워 두 권을 사 가지고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3일기도의 영적 파워를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쓴 이에스더 원장은 4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농촌목회와 개척교회를 위해 생명을 걸고 기도하던 중 사별하였다는 이 대목을 읽으니,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아내도 비슷한 나이인 45년생이고, 나도 그런 아내와 사별을 했기 때문이다. 몇 장을 더 읽다보니 의사는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한 후 알레르기성 천식이라고 진단해 주었다. 알레르기성 천식이라.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김집사님, 큰일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뜨거웠던 눈시울은 돋보기 유리를 흐르게 했다. 한 장을 더 넘겨 병원생활의 누적된 피로는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는 세상에서 숨이 막히는 고통보다 더 심한 고통이 있을까? 한두 시간에 한번 씩 주기적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려서 그녀를 탈진하게 만들었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밤에는 숨이 막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홀로 앉아 눈물만 훌쩍이면서 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낮에는 조금 덜 하는 듯 하 다 잠 못 이루는 밤의 고통이 연속되면서 밤과 낮의 악순환은 거의 매일 되풀이되었다. 이런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고통이었다. 밤에는 구급차를 다고 병원으로 가야했다. 위기상황이 휘몰아쳐 올 때는 평소 사용하던 흡인제(우리 집에서는 흡입기라 했다.)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때 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더 이상 읽기가 싫어서 책을 덮고 눈을 감았더니 잠이 들었다. 저녁도 먹지 않고 잠을 자다 자정 넘어서 잠을 깨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다보니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슬퍼졌다. 연휴독서는 이런 뜻이 아니었는데 하면서 다시 책을 덮고 잠이 들었다. 오늘은 주일이니 05시에 기상해야 1부 예배를 드리러 갈 수 있다. 071부 예배를 참석하려면 전철 두 번 환승하고 걷고 하여 1시간정도 걸린다.

 

우리 다섯 식구가 모두 동원교회서 세례를 받고 계속 출석했기 때문에 멀리 이사를 하고도 교회를 쉽게 옮기지 못하고 만 3년이 다 되도록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 책 26페이지에서 39페이지까지 김 집사님의 다메섹 체험기 간증은 아내가 생전에 앓다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버린 상황과 꼭 같다. 눈물이 아니면 글을 읽을 수 없고 잊으려고 노력한 아내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그때 이 책이라도 있었다면, 3일기도원을 찾아 작정기도라도 했으면 한 메침이 덜 할 것을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내 병에 너무 무관심했던 죄책감에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나를 부 르 소 서 나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너무나 무관심한 죄인이다 무관심 죄 명이 너무나 나에게 알맞은 죄이다. 19971013일 월요일 퇴근시간 1시간을 남겨놓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택시로 병원에 실려 왔는데,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고 빨리 오라는 전화였다. 그때 나의 상황은 글로 표현 할 수 없다.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에 가보니 응급실입구에 야전침대에 흰 시트로 덮어 잠잔 듯 누워있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하나님 내 죄를 용서 해 주십시오.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세 자녀 다 가르쳐 놓고 결혼하나 시키지 않고 떠났으니 어찌합니까?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눈물은 나오지 않고 소리만 쳤다. 75십 볼트이상의 고압에 감전했을 때 그 누가 하나님을 찾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원망도 했습니다. 얼굴을 보니 잠든 것같이 편안했고 화장하고 외출한 얼굴은 평소보다 더 어여쁘게 보였다. 몸을 만져보니 열기가 아직도 있고 배를 눌러보니 소리가 나서 의사께 살아있지 않느냐고 소리도 쳐보았다. 지금도 그때 어여쁜 얼굴은 영혼은 이미 하늘나라로 갔겠지만 그때 얼굴은 영원히 보고 싶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고 남은 것은 생전에 나의 잘못했던 죄책감만 나를 괴롭힌다. 누구나 살다보면 한가지병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나도 낙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 자취로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온몸이 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학교 다닐 적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허약했고 좌골 신경통으로 서울대학병원 신경외과 심부교수님으로부터 잘못하면 다리절단 할 수도 있다는 진단도 받았고 방학때 시골에서 밭농사 도와주다 쓰러진 적도 있다. 그리고 요도결석으로 허리가 찌져질 것 같은 통증에 시달릴 때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찾기도 했다.

 

지금도 약간에 혈압이 있어 약으로 조절하고 있다. 사람에 병은 육체적병과 정신적병이 있는데, 육체가 약하면 병이 침범하고 정신이 약하면 마귀가 침범한다. 더욱 우리 믿는 자는 영육 간에 약하면 마귀에 첫째 공격자가 됨도 알았다. 병에 공격을 받지 말아야 하나 그것은 쉽지 않고 몸에 공격을 받고도 모르다가 심한 통증으로 병원을 찾고 기도원을 찾는 것이 사람들 심리다.

 

그럼 병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냐에 따라 병의 차도는 결정된다고 본다. 본인의 의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의사와 가족들의 최선을 다한 후 그 다음에는 신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제야, 무관심 죄가 얼마나 크고 잔인한 인간의 죄인지 알았고 아내의 은공은 지상생활에서 다 갚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나도 나를 나아주신 부모, 수족인 형제도 돌아가셨지만 아내의 죽음은 팔다리가 절단해 나간 아픈 심정이다. 팔다리 절단은 그 순간만 아프지만, 정신적으로 이렇게 계속되는 아픔은 더한 것 같다. 아내가 죽으면 앞에서는 울고 돌아서면 웃는다는 말은 진담도 농담도 아니다.

 

모든 것은 운명에 맡기자.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살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도도하나 내심은 외롭다. 독수공방일 때는 더욱 외롭다. 님의 침묵에서 님 은 떠났지만 나는 님 을 보내지 않았다. 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몸만 갔지 영혼과 유품은 그대로 내 주변에 맴돌고 있다. 유품은 위치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데 어찌 님을 보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동반자를 잃어버릴 때 그 아픔은 마찬가지지만 누구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잘 사는 것인지가 숙제로 남는다.

 

어린 4남매를 둔 30대 중반의 여인에게 있어서 홀로된 아픔. 그래도 굽힐 줄 모르고 목회생활을 함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삶의 모습임에 대단한 존경을 보냅니다.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그럼 나는 홀로 무엇을 하고 만 3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는 말인가...미약하지만 나름대로 홀아비가 되어 최선을 다했기에 부끄럼 없이 진솔하게 말하고 싶다.

 

아내와 같이 다섯 식구가 새벽예배를 드린 가정예배를 삼남매와 같이 4식구가 드렸다, 그 후로 두 딸은 결혼하고 아들은 지방에서 대학 다니기 때문에 지금은 혼자 예배를 드린다. 아내와 같이 다니던 교회를 배반치 않고 계속 나가고 있다. 정년을 16개월 남겨놓고 떠났지만 직장과 가정도 잘 관리하면서 작년 630일자로 정년퇴직을 했다. 아들은 군대제대하고 3학년에 복학하여 장학금도 받고 삐뚤어지지 않고 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

 

첫째 딸과 둘째딸은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사위들은 대학을 나온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큰딸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여대와 시민대학에서 아동미술강사로 둘째 딸은 Y. W. C. A 인터넷 강사다. 나도 정년을 하고 안방이 흔들리면 내가 흔들리고 내가 흔들리면 자식들이 흔들려 가정은 넘어지기 쉽다는 생각에 안방을 든든하게 하기 위해 아내가 있을 때보다 더 규칙적으로 삶을 살고 있다. 이제 안방은 부부가 잠자는 방이 아니요, 기도 방이요, 독서 방이요, 홀로 사색의 방이 되었다. 그렇다고 내 생활이 침체되거나 은둔생활이 아니다. 즐겁고 보람 있는 삶의 길을 찾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다. 새벽 05시기상예배를 드리고, 봉화산 능선산책, 집안청소, 세탁기 돌리기, 빨래 널기, 밥 짓기, 설거지하기, 반찬사오기, 베란다에 아내가 기르다 가버린 화분에 물주기 등 집안일도 여자에 못지않게 열심히 한다. 무엇보다도 신앙이 침체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생각에 금년부터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평신도 지도자과정에서 하나님 말씀, 심리상담학을 공부한다. 지금은 2학기등록을 하고, 95일부터 강의가 시작됐다. 평신도 지도자과정을 수료하면 목회자 길로 공부를 더하고 싶으나 나이가 많아 이제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찬 송 460장을 즐겨 부르며 살아왔고 살 것이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주시고 모든 일은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 안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서 험한 산길 헤 멜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 로 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게 맡겨 벗을 날도 멀 잖 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요나 3일 영성 원 편지1. 2

 

2000,12,16, 상품 발송 지난번 3일 기도의 영적파워독후감 공모 결과 통보 후 많은 시일이 경과되어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상품 제작사의 어려움으로 예상보다 늦게 전달하게 된 점 양해를 바랍니다.

 

당초에는 요나 3일 영성 원 확장 헌당 예배 시에 상품을 수여할 계획 이었으나, 가능한 빨리 전달하는 것이 나를 것 같아 우수 및 가작 입선자 모든 분 들게 우편으로 발송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초청장을 참조하시고 1228()8시의 헌당예배에 참석해 주셔서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축하를 드리며, 성탄과 새해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임마누엘 원장 이 에스더 목사 드림

 

편지2. 하나님의 은혜가 권치남 성도님과 자녀들 그리고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새 길가에 쌓였던 눈도 다 녹아 내렸고 길게만 여겨지던 모진 한파도 물러가면서 가슴 설레게 하는 설날이 성큼 다가 왔습니다

 

어떻게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 궁금하시겠지요? 지난 125일 국민일보에 게재된 글을 보면서 10년 전에 사모님을 먼저 보내신 가슴 아픈 이야기와 함께 현재 어떻게 살아가시는지 소게하는 가운데 저의 책 3일 기도원의 영적 파워가 언급된 것을 보고 눈이 둥그레지면서 그 글을 다시 보았습니다. 그리고 국민일보 종교부장에게 전화를 걸어내용을 애기하면서 권치남 성도님의 전화를 알고자 했는데 대신에 주소를 알려줌으로써 이렇게 감사의 글이라도 쓸 수 있게 되었답니다. 혹시 시간을 내시어서 현재 저의 큰 사위 장덕봉목사와 함께 제가 사역하는 요나3일영성원에 오실 수 있으시면 기쁘게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라도 대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보냅니다. 주소 :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2459번지 홍제원 현대 아파트 후문입구요나 3일영성원(홍제역 2번 출구에서3분거리)전화:02-396-7171 : 010-9347-3171 시간이 허락되실 때 연락 주시고 오셔서 주의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주입니다 감사합니다. 임마누엘 201024일 요나 3일 영성원 원장 이 에스더 목사 드림

 

53. 추도사 3

 

하나님께 예배 드닙니다.

 

! 어제 밤 형이 소천 했단 소식 듣고

 

삼십년 전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의 연애시절, 약혼시절, 결혼식장까지

 

동행하며 지켜봐주시고 보살펴 주었지요.

 

. 북가좌동150번 버스종점

 

자택, 사직동 골목 선술집 이집 저집

 

웃고 웃긴 농담도 많아 고 술도 많이

 

마셨 지요, 이젠 다 지난 추억들..

 

! 지금 가시는 길은 영원한 길

 

편안한 곳 입니다.

 

근심걱정 없는 곳, 지금가시는 길

 

누구나 꼭 가야할 공도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생자 필별 이 요, 회자정리 하니,

 

인지공도라 하지 않았던가요.

 

극 찬 형! 이제 보고프면

 

내 결혼 엘 범 꺼내 보지요.

 

편히 가셔서 잘 사십 시요.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2001. 4. 17.

 

54. 권오연 석 . 박사 길

 

꼬리보다 머리가 좋아서

 

이곳에 왔는데

 

제대 하니 10년의 길

 

빨리 가면 4시간 길

 

가는 길 오는 길 버스로 8시간 길

 

구비 구비 오르내리는 높고 험한 한계령 길

 

오를 때 다르고 내려 올 때 다른 길

 

신비한 한계령 길

 

머리위에 저 길

 

발밑 저길

 

처다 보고 내려다보이는 저 험한 길

 

내가 가는 길

 

가다보니 내가 가는 길

 

험하고 먼 길

 

중국보다 멀고 일본보다 멀 구나

 

고생으로 오 갓 던 한계령 길

 

헛되지 않은 길

 

. 박사 기다리는 길

 

2002. 2. 22. 졸업식 날

 

55. 소록도 순교지 기행

 

4회 순교정신선양 독후감 공모 신청일 : 2004425일 제목: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김남식 저 김정복 목사)독후감 공모에 선경 책을 상으로 받고 소록도 순교자 12일 탐방했다. 200371-2일 총회 순교자기념 사업본부 주관의 순교지 탐방 행사로 소록도 중앙교회와 여수 애양 원을 순례하게 되었다. 일반여행처럼 생각하고 갖다 오려고 했지만, 순례 지를 방문한다는 생각에 나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아니, 나의 고향을 간다는 생각과, 나의 과거의 역사를 거슬러간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거쳐 가는 선교 지들이 내게는 예사롭지 않았다.

 

집에서 0530분에 출발하여 총회에 07시에 도착하였다. 총회 앞에 대기된 대형버스 3대 중 1호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는 1호차를 선두로 출발, 서울 시내를 빠져나가 안개 낀 고속도로를 갓 다. 천안부근에 가니 소나기가 억수같이 내렸다. 망향 휴게소 도착까지 비는 계속내리고 우산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산을 사느라 분주했다. 버스는 전주를 향해가고 날씨는 언제 비가 내렸나 빛이 나기 시작했다. 전주와 남원을 거쳐 구례 지리산 노상에서 점심을 먹고 순천. 벌교. 고흥. 녹동선착장에 도착하여 모두들 하차하였다.

 

다시 우리는 여객선으로 올라 10분 이내 소록도로 건너갔다. 내 생전 처음으로 소록도 땅을 밟았다. 마음에 준비된 마음으로 갖지만, 막상 접하고 보니, 소록도에는 나병환자가 사는 곳이라 생각 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움 추려졌다. 소록도 선착장에 도착하자 봉고차와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원하는 차로 순교자 김정복 목사님 사역 지 소록도 중앙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기 위에 모였다.

 

교회는 크나 성도들이 앉을 의자가 없다 맨 바닥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앞에는 우리 일행이 앉았고 환우들은 뒷 자석에 줄을 지어 앉아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끝나고 입구에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소록도의 순교자 김정복 목사님의 삶의 책과 기념 수건을 받았다. 소록도 전체를 보지 못하고 고흥 육지로 나와 부두 산미 호텔 300호에서 평양출신 80세 할아버지와 하룻밤을 지냈다.

 

그 할아버지는 형이 평양신학교를 나와 목회하시다가 행방불명된 분이셨다.

 

어르신과 삶에 대하여 하루 밤을 지냈고 아침식사를 하고 여수 애양원에 손양원 순교기념관로 떠났다. 부끄럽지만, 애양원이 무엇하는 곳인 줄도 모르고 나는 갔었다. 애양원은 1909년 포사이트 선교사가 길에 쓰러진 나환자를 치료한데서 설립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곳은 전남 동부지역 능주, 남평, 화순, 순천, 여수, 보성, 장흥, 강진, 등지를 맡아 선교활동을전념하였다.

 

지금은 기독성지 사회복지법인, 애양병원, 성산교회, 애양평안요양소, 애양재활직업 보도 소 시설이 있으며 환자들이 요양하며 치료하는 곳이다. 특히 손양 원 목사 사역 지며 순교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기념관은 잘 정리 정돈된 유품들이 많이 있었고, 손양 원 목사님의 손때 뭍은 성경책과 여러 책들이 많이 있었다. 기념관에 소장된 사진 중에는 손양원 목사님이 환자들의 환부를 만지는 사진 있었는데, 사랑이 무엇일까? 사랑은 어느 정도 깊이 할 수 있나? 생각해 보았다.

 

순례여행을 돌아온 후, 김정복 목사님에 관한 김남식 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책을 읽어 갔다. 김정복 목사님은 손양원 목사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순교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리가 양떼를 공격할 때, 한센 병 양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아름답게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김정복 목사님은 18827월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부 김성오 와 모 이경숙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899년 봄 대한제국 전주 부 진위대에 입대하여 곡호수(군악대)로 근무하였고 1905년 제대하였다. 1905년 여름에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이주 마우이 섬 하나(Hana) 농장에서 일하였다. 1915년 그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 늦게 졸업하였다. 이후 1924년 전남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게 되었다. 그의 목회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제주도에서 목회하던 시기이다. 19242월부터 그는 제주도 성내교회와 삼양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2기는 벌교 고흥에서 목회하던 시기이다. 192611월부터 1937년까지 그는 벌교읍교회, 고흥읍교회와 길 두 교회에서 시무를 하였다.

 

그 후, 1938년 그는 일제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고흥경찰서에 구속되었고 긴 어두운 터널이 끝날 무렵 19445월 광주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마지막 제 3기는 소록도에서 목회하던 시기이다. 19464월부터 45개월간 비교적 짧은 기간, 김정복 목사님은 소록도 교회를 돌보게 되었다.

 

해방될 당시 소록도 교회는 목사가 없었다. 1922년 교회가 설립된 후 453월까지 다섯 명의 목사가 시무하였는데, 그 중 당회장을 맡은 오석주 목사를 제외한 4명이 모두 일본인 이었다. 소록도 교회는 특수성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의 교인은 다수가 한센 병(나병)환우였다.

 

영적으로 어둡고, 음침한 이곳에 1946년에 들어서서 교회의 재건논의가 다시 활기를 띠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소록도에서 가까운 고흥읍 교회에서 시무하는 김정복 목사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나이였다. 그 나이에 새 사역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정복의 목회 초기 일념과 기도는 단순했다. 그의 일념과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생을 살게 하소서였다.

 

김정복 목사님은 19464월부터 소록도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한센 병 환우들의 신앙을 지도하였다. 그 해 6월에는 8명의 장로로 당회를 구성하고, 역사적인 첫 당회를 구성하였다. 첫 당회는 교회의 치리와 진로문제를 논의하였다. 교회는 기본적인 틀이 점점 잡혀 갔다. 하지만, 그가 헤쳐 나가야 할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소록도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장벽이 많았다.

 

목회는 목자와 양간의 만남과 대화가 중요한데, 소록도는 철조망을 사이로 직원지대와 병사(病舍)지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환자들은 직원지대를 갈 수 없는 규칙이 있었다. 교인들은 목회자를 만날 때면 얼굴을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돌리고 이야기해야 했다. 이런 장벽들이 있었지만, 김정복 목사님은 사역에 있어 기본원칙을 중요시 여겼다. 육신의 고통과 질병을 갖고 고통 한 교인들을 마냥 받아주기만 하지 않고, 그는 신앙으로 육신의 한계를 이기는 법을 가르치고자 했다. 이를 이기는 것은 말씀을 붙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 있게 성도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설교는 말씀 중심의 조용한 설교였지만 사람의 가슴에 진실을 심어 주었다. 그는 진실을 행동하는 자였고, 진실을 말하는 자였다.

 

한편 김정복 목사님 성경을 바탕으로 제자훈련과 평신도양육을 하였다. 그 혼자서 4000명이나 되는 양들을 돌볼 수가 없었기에 그는 평신도들의 자원을 극대화하여 평신도가 교인들을 돌보게 하였다. 각 부락마다 교회가 있고, 장로와 장립집사, 전도 인을 두어 교인을 돌보게 한 것이다. 또한 교회의 권징을 확실하게 하였다. 불법 혼사 즉 불신자와 혼인을 하게 되면 책벌을 주었다. 권징에는 불법혼사가 많았는데, 여기에는 소록도의 특성에 기인하였다. 사람들은 한센 병에 걸리면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부부의 경우에도 헤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이들이 소록도에 입원하면 옛날의 모든 것과 단절된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불법혼사가 생기기 쉬었다. 끝으로 그의 목회는 사랑의 목회였다. 소록도 환우들은 병들고 가난하였다. 그들은 소외된 상태에서 살아갔기 때문에 교회를 통하여 위로와 소망을 얻었다. 그래서 목사의 심방은 큰 위로였다. 목사가 심방을 가면 교인들은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멀리서 목사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였다. 병든 교인들 중에는 심방 온 목사에게 알사탕 하나 먹어 보내면 원이 없겠다고 하소연하는 자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김정복 목사님은 자신의 사례금으로 사탕이나 교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사다 주었다. 교인들은 그들의 목회자가 단순히 설교자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특히 김정복 목사는 60대 후반기의 할아버지였으니 그들에게는 진정으로 마음을 열수 있는 아버지였다. 이런 사랑의 목회가 교인들의 가슴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게하고, 신앙의 성장을 가져오게 했다. 교인들에게 모든 사랑을 쏟으라고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것일까? 김정복 목사님은 부인 홍영과의 사이에서 소생이 없었다. 대신 그에게는 한 명의 양녀 정귀단과 많은 교인들이 있었다.

 

정귀단은 25세의 한센 병 환자로 소록도 형무소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녀의 죄명은 영아 살해 죄였다. 그녀는 자신의 한센 병이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도 감열될까봐 낳자마자 죽인 가슴 아픈 사연을 갖고 있었다. 김정복 목사님은 소록도 교회에 부임한 이후 매주 한 차례씩 형무소를 방문하고 제소 자들에게 전도를 했는데, 이때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김정복 목사님의 설교를 귀담아 들었고,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에 감격하였다. 김정복 목사님 그녀가 불쌍했다. 이 세상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데 없는 사람. 스물 다섯 꽃다운 나이에 죄수가 된 모진어미였으나 김정복 목사님 그녀의 자그마한 체구에서 삶의 의지를 발견하였다. 김정복 목사님 자기가 읽던 성경책을 그녀에게 주면서 성경읽기를 권면하였다.

 

김정복 목사님은 그녀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감사하였고, 그녀를 돌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귀단은 김정복 목사님의 양녀로서 입적되고 돌봄을 받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한국전쟁의 비극은 조용한 소록도에도 밀려왔다. 195085일 북한군 40명이 소록도를 점령하고, 소록도를 공산체제 화하였다. 원 내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여성동맹과 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공산주의에 동조하던 사람들과 일부 불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소록도 전체를 장악하였다. 이들은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공산군들은 세례교인들을 강제로 이동시키고 교회의 간판을 내린 후 인민공화국 간판과 깃발을 달게 했다. 또 기도와 찬송을 중지시키고 공화국노래나 군가를 가르쳤다. 김정복 목사님은 인민의 적이며 미 제국주의자의 앞잡이로 몰려서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았다. 항상 감시가 뒤따랐다. 김정복 목사님은 조용히 엎드려서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장로 몇 사람이 시국이 심상치 않으므로 김정복 목사님이 피신하기를 원했다. “목사님,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목사님의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 문제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피신하였다가 안정된 후에 돌아오세요. 그러나 김정복 목사님은 거절하였다. 목자는 양떼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했는데, 내가 살려고 이 양떼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장로들은 눈물을 흘리며 피신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결국 김정복 목사님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김정복 목사님은 어려운 나라와 소록도 교회와 양떼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더 간절해졌다. 그 기도는 눈물어린 통곡의 기도였다. 칠순을 바라보는 노 목사는 병든 양떼를 생각하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김목사는 특별 기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신생리 마을 뒤편 바위인 굴 날 뿌리 동굴에 혼자 들어가서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동굴은 김정복 목사님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찾아가는 영혼의 오아시스요 기도처였다. 한편 소록도를 장악하고 있던 공산군들과 인민위원회에서는 야단이 났다. 목사 놈이 도망갔다 빨리 잡아 라 공산군들은 김정복 목사를 찾지 못하자, 교회장로들을 취조하고 고문하였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자 그의 양녀 정귀단을 잡아와서 고문하였다. 수없이 매를 맞은 정귀단은 혀가 빠질 정도로 고통을 겪었다. 반송장이 되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목사님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비극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1950828일이었다. 소록도 원생 청년들의 밀고로 김 목사님은 공산군에게 체포되었다. 교인들은 체포되어 끌려가는 김 목사님을 보고 울부짖으며 땅을 치고 통곡하였다, 금식하여 연약해진 몸, 칠순을 바라보는 늙은 몸이 아닌가. 목사님, 이렇게 가시면 안 됩니다. 저희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통곡하는 교인들을 향하여 김정복 목사님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움이 와도 신앙의 절개를 지킵시다.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여러분, 하나님이 위로해 주실 것이니 안심하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김정복 목사님은 교인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 가는 길의 이별이었다. 이때 모인 교인들 속에서 찬송소리가 터져 나왔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 켰 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 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1950930일 새벽 고흥경찰서에 유치장에 수감된 김정복 목사와 우익청년들은 인민군들에 의해 고흥경찰서 뒤 산으로 끌려갔다. 인민군들은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산 속에서 사람들을 하나씩 나무에 묶었다. 김정복 목사님은 앉은 자세로 묶여 기도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을 순교의 제물로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 소록도 성도들을 지켜 주소서. 저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지휘관의 호령에 따라 인민군들이 총을 쐈다. 새벽을 깨워 총소리가 울려 퍼 졌다. 이렇게 하여 김정복 목사님은 69세의 나이로 순교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나라에 가게 되었다. 나그네 인생을 마치고, 그는 천성을 향하여 하나님께 갔다

 

순례지 방문과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목자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목자를 생각하게 되었다. 김정복 목사님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듯이, 한센 병 환우들을 끝까지 사랑하였다. 그는 사명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물론 그 또한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의 양들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했다. 나는 김정복 목사님의 양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나는 3년 전부터 33년간 다녔던 회사를 정년은퇴하고, 주일학교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의 직분을 맡고 있다.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으로 나의 인생은 급전환을 하게 되었다. 나의 장래를 조금도 알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새벽마다 깨워 기도하게 하시고, 말씀묵상을 하게 하셨다. 말씀묵상은 방황하던 나에게 죄 악 된 습관을 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방향과 용기를 주었다. 이전에 나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술을 즐겨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점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하시고, 끊게 하셨다. 또한 갑작스럽게 신학대학원 북한 선교 학을 전공하게 하시고, 60대 중반의 나이에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회의 반사의 직분을 맡기셨다.

 

60이 넘는 나이에 남들은 무슨 주책이냐고 핀잔하기도 했지만, 나는 엎드려 기도하며, 세상을 이겨가고 있다. 그러나 때론 이 나이에 내가 꼭 이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새벽녘에 일어나 어린이 예배를 드리러 교회를 향하는 것과 공과공부를 연구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김정복 목사님의 순교를 통해 내 자신을 다시금 추스르고 싶다. 어린 손자와 같은 아이들을 더 깊이 사랑하고 싶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를 흘리고 십자가에서 죽는 고통을 당하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한 조그만 헌신에도 힘들어했던 것 같다.

 

다시금 하나님의 주신 나의 귀한 사명을 충성을 다해 섬기고 싶다. 어린 나의 학생들 중 미래에 김정복 목사님과 같은 순교자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주일학교 교사로 어린 영원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내게 늦은 나이에 북한 선교에 관한 공부로 인도하셨는데, 열심히 연구하여, 준비된 종이 되어, 미래 북한 지역 어린이들 사역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싶다.

 

56. 북한 땅 평양에 가다

 

2차 선교 여행

 

서울(인천공항)에서 북한(평양 순한 공항) 북한만나운동은 옛 구약시대에 광야 40년 동안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사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셨듯이 지금 북한의 하늘에서 만나같이 소식과 물자를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평양 칠골 교회에서 열린조국평화통일기원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12일 일정으로 평생 처음 평양에 다녀왔다. 평양은 서울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인천공항을 이륙한 전세기는 서해안 직항로를 통해 50분 만에 순안비행장에 착륙했다. 비행장은 평양 교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논과 밭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북한의 대표적 비행장이라고 하지만 눈에 띄는 비행기는 별로 없었으며 청사내 손님도 우리 일행이 전부였다.

 

우리는 몇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평양 시내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가을걷이가 한창인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이었다. 올해는 작황이 괜찮아 식량난 타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평양 시내로 들어서자 건물 대부분은 고층 아파트였으며 선전구호가 적힌 긴 플래카드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대중교통은 궤도 전차가 주류인 것 같았으며 자전거와 도보로 이동하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거리는 비교적 깨끗하고 조용했으며 여성 교통경찰이 절도 있게 차량 통행을 통제하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애당초 일정은 공항에서 곧바로 이동하여 칠골 교회에서 기도회를 가진 후 다음 날 묘향산을 갖다 오는 것이었다. 산을 좋아하는 필자는 묘향산 방문에 큰 기대를 걸었으나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평양에 도착한 후 모든 일정은 북측의 계획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만수대의사당 앞에 있는 김일성 상 앞에 잠시 머물며 주변을 둘러본 후 숙소로 정한 양각도 호텔로 향했다. 그곳은 대동강 양각 도라는 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대동강과 평양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47층 규모의 훌륭한 시설이었다. 방안에 설치된 TV는 북한 방송은 물론 중국과 일본방송,BBC방송 등을 시청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열린 아리랑 축전을 관람하게 되었다. 주차장에서 경기장 입구로 향하는데 일단의 젊은이들이 한반도기를 흔들고 조국통일을 큰 소리로 외치며 들뜬 모습으로 우리를 앞질러 입장하고 있었다. 국내 모 기업체의 노조원들이라고 했다. 북한 주민들이 일어서서 그들을 박수로 맞았다.

 

아리랑 축전은 연인원 10만 명 출연하는 대규모 집단체조였다. 특히 수만 명이 마치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현란한 대규모 카드 섹션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것은 북한 사회에서나 가능한 현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주민들이 극심한 빈곤과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그런 체조나 카드섹션을 통해 단합된 힘과 일체감을 형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면서 전체주의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만경대의 김일성 생가를 방문한 후 칠골 교회로 향했다. 김일성의 어머니가 다녔던 곳으로 알려진 칠골 교회는 작고 아담한 시골교회였다. 우리 일행은 칠골 교회에서 남북교회 연합으로 성찬식 예배를 드리며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북쪽에서는 순서를 맡은 봉수교회와 칠골 교회 목사, 전도사 그리고 성가대가 참석했다. 그러나 실상은 남쪽에서 간 사람들의 예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쪽 교인들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신대 총장님은 준비해간 성경 찬송 한 권을 교회에 슬쩍 놓고 나오고 필자는

 

3차 선교 여행

 

평양시내 사진 찰영 강력 제안 구역을 출국금지를 각오하고 많은 사진을 찍어서 몰래 갖고 왔다. 우리 동행자들은 동포 복음화 열정을 보였다고 본다. 최근 평양 봉수교회의 실체 문제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그 교회가 단지 북한의 대남 공작기관의 외화벌이에 동원된 가짜 교회라고 주장하며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나 북한 교회와의 교류를 전면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봉수교회가 비록 공산주의 체제 아래 있지만 진짜 교회라고 주장하며 지속적인 교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비록 짧은 일정의 칠골교회 방문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북쪽교회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남북교류라는 사실이다. 남북이 가능한 한 많은 경로를 통해 자주 만나 교류하는 것이 상호 이해와 궁극적인 평화통일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한다. 12일 여행은 잡지만 마음은 길고 순교정신으로 긴장 속에 갓 다 돌아 왔다.

 

57. 북한 땅 개성에 가다.

 

2008426-개성-박연-02-29 명찰을 목에 걸고 개성관광객으로 출입했다. 내게는 2005104-51박 평양방문 북한 땅 두 번째 날이다.

 

버스는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구반포 김병로교수 자택 부근 반포교회 앞에서 출발했다. 버스는 북으로 향했고 나는 피곤함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50분을 달린 버스는 우리 측 CIQ에 도착했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가까운 거리다. 간단한 출국수속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약 5분정도를 달린 버스는 멈추었다. 이번에는 북측 CIQ. 어떻게 생겼을까?, 그들의 말씨는 평양인민들 말과 다르게 서울 표준 말씨와 비슷하다., 우리는 실내로 들어서고 드디어 그들을 보았다. 마른 체구에 약간은 그을린 얼굴. 약간은 퉁명스런 말투에 경색되고 차가운 표정이 우리를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때로 웃기도 하면서 우리일행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가진 경직된 생각의 소산이리라. 생각보다 입국 수속은 까다롭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달리는 버스 창을 통해 간간히 북한 군인들의 모습이 지나갔다. 마르고 까만 얼굴사이로 드러난 눈빛이 인상적이다. 버스는 채 10분도 되지 않아 개성공단에 도착했다.

 

준비된 장소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열기가 느껴진다. 귀엽게 생긴 북한의 여자가 우리를 선생님이라 호칭하며 차분하고 호소력 있는 음성으로 개성공단에 대한 개요를 설명한다.

 

설명에 의하면, 개성공단은 3단계로 나누어 개성시 주변의 총 2,000만평을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1단계 본 단지 조성의 막바지 공사가 진행 중이다. 1단계는 사업기간이 2002년부터 2007년 이며 100만평 부지에 사업비는 총 2,025억 원이다. 수행방식은 북측으로부터 토지를 50년간 임차하여 공업단지로 개발 후 분양하는 방식이다. 토지조성공사는 작년 5월에 완료 하였고 작년 12월에 10kw 남북 송전선이 연결되었다.

 

2006121일 기준으로 개성공단의 인원은 남측 상주인원이 847명이고 북측 노동자는 11,189명이다. 이들은 입주기업 8,608, 지원기관 346, 공사인력 2,23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성시의 인구가 약 10만 명이라 한다.

 

이곳의 근무조건은 최저임금으로 사회보험료 $7.5를 포함하여 월 $57.5이다. 연장, 휴일 근무 시는 임금에 50~100% 가산 지급된다. 법정근로시간은 주 48시간이내이다. 참고로 한국과 중국의 월 최저임금은 한국이 790달러이고 중국은 99.28달러이다. 개성공단의 최저임금은 우리나라 대비 6%이며, 중국대비 50%이다.

 

아울러 개성공단은 서울에서 60km, 인천에서 50km에 위치하고 있다. 거대 소비처인 수도권을 배후지로 활용하여, 물류비를 상당히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또한, 경의선 도로, 철도 연결을 통해 인천공항이나 인천항도 활용가능하다. 개성은 평양에서 160km에 위치하고 있어 남북 경제협력의 전초기지의 역할이 가능하고 향후 중국횡단철도나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돼 유럽지역 육로물류도 가능하여 동북아 경제협력의 거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 기업이 활동하기에 개성공단의 여건은 양호해 보였다. 우선 언어 및 문화적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다. , 노동자들의 교육수준이 양호하여 양질의 노동력이 확보된다는 점이다. 아울러, 평당 분양가는 149,000원으로 우리나라에 비해 엄청나게 낮다. 세제에 있어서도 법인세 10~14% 등 다양한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뷔페식당음식이 아니고 한식이다. 반찬이 많다. 그러나 맛은 좋지 않다.

 

그곳에서는 시각적으로 개성공단의 위용을 느낄 수 있었다. 모형으로 만든 개성공단의 위용은 대단했다. 3단계로 진행될 개성공단은 약 2,000만평의 부지위에 남북한의 민족번영과 평화가 펼쳐져 있었다.

 

입주 업체 한 곳도 방문하지 않고 박물관과 산에 등산겸 절만 구경했다했다. 특이한 것은 산 바위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 찬양 글과 특정인 이름들이 많다.

 

간단히 견학을 마치고 귀경이다. 황진이, 벽계수, 선죽교를 아쉬움으로 남기고 서울로 향했다. 버스로 가면 1시간 남짓 걸릴 곳을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관광 도중 보초 병 정복군인 사진 찰영 했다가 경내방송이 보초병 찰영 자는 사진 지우거나 출두하라는 안내방송에 깜짝 놀라 허둥지둥 하는데 우리 버스 안내자가 이 버스 내 찰영 자가 있다고 묻기에 얼른 손들고 지워 달라고 부탁하여 무마했다. 북한 땅에서는 신변을 보호 받기위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지시에 각별히 조심해야한다. 개성방문은 평양방문 보다 더 감시가 심했다.

 

58. 허리신경 치료과정기록

 

나는 학창 시절 자취 생활에 영양부족으로 몸이 만신창이 되고 허리뼈 4-5번 물렁뼈 노출로 하반이 마비되고 누워서 밥을 먹고 서울대 병원에서 신경 외 과 심 교수님(의사)께 방치하면 다리를 절단 수술까지 갈수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런데 노후에 심한 등산으로 재발한 것이다.

 

치료방법 허리신경성형시술 날짜 2010-05-28

 

20091212일 토요일과 13일 일요일 등산을 심하게 했다. 그런데 2~3일 후에 다리가 붓고, 우측 다리가 저리고 아파 도저히 걷기가 힘들고 고통스러워 약 15일간 동네 병원 한의사, 정형외과, 통증 클리닉등 치료를 받다가 도저히 통증과 고통을 이기지 못해 종합병원(을지병원)에 가니 사진촬영과 진찰결과 수술판정이 나와(1230) 의사선생님께서 15일 입원 수속을 받고 6일 수술하기로 결정하고 연휴를 지나서 5일날 입원 수속하기로 했다.

 

그런데 11일 친척들이 집에 인사차 와서 수술은 차후 후유증으로 재수술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한의원에서 치료하라는 권유로 을지병원의 수술 절차를 중단하고 있다가 14일자 국민일보의 기사를 보고 내용이 본인의 병세와 일치하여 수술 않고 치료가 가능하다는 내용에 다리를 끌고 아픔에 고통을 참고 태능에서 신사동까지 지하철 2번 갈아타고 지옥 같은 거리를 찾아와 병원에서 부원장님 상담 후 바로 시술 결과 가는 발걸음이 천국 같은 기분으로 집에 도착 하였고 1주일 간격으로 치료한 결과 약 2개월 치료 결과 완치되었습니다. 세연클리닉 병원장님과 박부원장님 그리고 직원들에게 감사 합니다 201033일 환자 병에 원인은 무리한 산행이다. 1차 산행 시작 2009328일 토요일 사직공원에서-장안문까지 인왕산 정상 봉우리? 빼어난 정상의 모습을 상상하셨다면 실소를 하시리라~하지만 정상에서 둘러보는 사방은 확 트인 시야와 서울의 모습들, 저기 능선에 보이는 성벽 따라 하산을 하면 사직 공원쪽(내가 오르는 길이다) 2차 산행 2009613일 토요일 장안문에서-삼청공원하산-종각역3차 산행 2009711일 토요일 대학로 뒷 공원 낙산고원 4차 산행 2009725일 봉화산역 집에서-육사-불암산 정상-상계역하산<불암산>높이 509.7m이며 필암 산-천보 산)이라고도 한다. 불암 산은 덕릉고개 남쪽에 높이 420 m의 또 하나의 봉우리를 거느린 산으로 산 자체는 단조로우나 거대한 암벽과 절벽, 울창한 수목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치를 자랑한다. 산 남쪽 사면에는 불암산 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또한 산에는 신라 지 증 국사가 세운 불암사와 그 부속 암자인 석천 암이 있고, 조선시대에 무공이 세운 학도암 등도 있다. 그 밖에 산중에는 태릉·강릉 등의 능이 있고, 산정에는 옛 성터와 봉화대 터가 남아 있다. 부근 일대에는 육군사관학교- 서울여대-삼육대학-태릉선수촌 등이 있다. 서울 근교의 등산 코스로 개발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든다. 5차 산행 200981일 수락산역에서 유원지-골짜기-수락산 중간 정상-장암역하산 6차 산행 200995-26일 도봉산역-망월사역-회룡역-포대능선-석굴암 - 김구선생 필적 사패능선 -송추계곡하산 -버스의정부역-집으로 산행도 중독이고 적당한 운동이 건강에 좋다. 노년운동은 집근처 봉화산 능선 산책과 복지관 자전거 타기가 적당하다. 등산도 중독 이다.

 

59. 사별한 아내 되새기며 신앙의 가족매진

 

20009월 추석 연휴 때였다. 연휴 동안 독서할 요량으로 서점에서 3일기도의 영적 파워와 다시 보는 세상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3일기도의 영적 파워를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쓴 이에스더 원장은 194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농촌목회와 개척교회를 위해 생명을 걸고 기도하던 중 사별했다는 대목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나의 아내도 비슷한 나이인 45년생이고, 나도 아내와 사별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 중 다메섹 체험기 간증은 아내가 생전에 앓다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버린 상황과 똑같았다. 그때 이 책이 있었다면, 3일기도원을 찾아 작정기도라도 했으면 한 맺힘이 덜했을 텐데 그렇지만 아내 병에 너무 무관심했기 때문에 죄책감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너무나 무관심한 죄인이었다. 19971013일 퇴근시간 1시간을 남겨놓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택시로 병원에 실려 왔는데,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라며 빨리 오라는 전화였다. 응급실 침대에 잠자는 듯 누워 있는 아내를 본 순간 하나님 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며 소리만 쳤다. 눈물조차 나오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찾으면서 한편으로는 원망도 했다. 그러나 지금 아내의 몸은 갔지만 영혼과 유품은 그대로 내 주변에 맴돌고 있다.

 

아내와 사별한 후에도 다섯 식구가 새벽예배로 드린 가정예배를 삼남매와 계속 드렸다. 우리 다섯 식구가 모두 세례 받은 동원교회에는 이사 후에도 배반치 않고 계속 나가고 있다. 99년 정년퇴직을 하고 두 딸은 믿음 좋은 배필을 만나 잘살고 있다. 아들도 군 제대 후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잘 다였고 박사학위도 밭았다.

 

안방이 흔들리면 내가 흔들리고 내가 흔들리면 자식들이 흔들려 가정은 넘어지기 쉽다는 생각에 안방을 든든하게 하기 위해 더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이제 안방은 부부가 잠자는 방이 아니요, 기도 방이요, 독서 방이요, 홀로 사색의 방이 되었다. 그렇다고 생활이 침체되거나 은둔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즐겁고 보람 있는 삶의 길을 찾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다. 새벽 5시에 기상예배를 드리고 봉화산 능선 산책, 가사일, 아내가 기르던 화분에 물주기 등 집안일도 여자 못지않게 잘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앙이 침체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생각에 지금은 아내가 하던 주일학교 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다. 국민일보2010125일자 월요일 33

 

60. 내가 겪은 6.25 다시는 이 땅에 전쟁 없기를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625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마을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마음분위기는 많은 상처를 갖게 되었다. 유학생들이나 부유한 집 자녀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검으로 사라졌다. 우리 집은 지대가 높아 경찰과 인민군이 교전상황을 다 볼 수 있었다. 전쟁 초기 경찰은 인민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인근 섬으로 후퇴 못한 경찰들은 인민군에게 포위되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안에 든 쥐가 된 상황이 되어 어쩔 줄 모르고 수수밭 속에서 총과 경찰복을 버리고 농사꾼 복장으로 갈아입고는 은신하기도 하였다. 또한 바닷가에서 인민군에 포위된 경찰은 총을 들고 바다 물이 들어오는데도 바다 속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갔다. 인민군들이 자수하라고 소리치며 총을 쏴도, 경찰들은 끝까지 총을 버리지 않고 물이 들어오는 바다로 계속 들어갔다. 어차피 죽을 몸 바다 속에서 죽지 인민군 총에는 죽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저무는 햇살은 유난히 붉게 비추었는데, 저 해가 지면 경찰관의 운명도 같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어린 내 마음도 슬퍼졌다. 밤이 지나 아침이 되니 경찰은 뻘 밭 위에 시체로 변해있었고, 파도에 쓸려가기도 하였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기를 기도한다. 국민일보 2010628일자 월요일

 

맺음말

 

내가 태어나 중학교에 가지 못할 집안 형편에서 억지로 중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가지 못할 대학도 억지로 졸업했으나 전공분야에서 근무하지 못하고 먹고살기 위해 다른 길 걸었다. 이제 회갑을 지나 아내와 갑작히 사별하고 작가나 선교사가 되고자 계속 공부하여 고희를 지나 석사과정 졸업과 박사과정 수료 후 논문학기다. 내가 공부를 다시 시작이 바른 길인지 모른다. 모두들 늙은 말년에 무슨 공부야고 비난한 분도 있으나 이 나이에 무엇으로 소일 할 것인가? 동반자도 없는 나의 삶에는 책 읽고 글 쓰는 일 뿐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 책을 발간하게 용기를 실어준 아들 딸 사위들과 십오 년간을 변함없이 홀로 가정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며 영 . 육간 건강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림 이다. 이 책은 부모님탄생 100주년 교회출석 20주년 아내 타계15주년 주일학교 교사 10주년 인내로 고통을 이긴 고희기념 출판 책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늦었지 만 시작이 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 다,“

 

To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to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인도 선교사 윌리암 케리의 말이다.

 

윌리엄케리는 청년시절 조그마한 구두수선 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세계선교의 비전을 실천하기 위해, 벽에는 세계지도를 걸어놓고, 구두수선을 하면서 5개 언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는 가죽지도에 깨알 같은 글씨로 각 나라들의 소식과 기도제목을 적고 기도하였다. 케리는 결국 자신의 일생을 인도에서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한편 케리는 지구본을 들고 다니며, 잠자던 영국교회를 일깨우며 세계선교에 동참하기를 호소했다. 또한 선교 관련책자를 만들어 선교 상황을 알리고 선교에 유용하게 사용되기를 원했다.

 

나의 땅끝 복음화 전략이 케리가 만들고자 했던 선교 관련책자의 하나라고 보았으면 한다. “땅끝 복음화 전략은 북한의 영적 상황을 알리고, 북한의 효과적인 복음화의 루트를 알리고자 했다.

 

부족하지만, 이 책이 북녘 땅의 복음화에 좋은 도구로 되기를 바란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