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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철 文史哲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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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첫 시간입니다. 공부는 한자로 ‘工夫’라고 씁니다. ‘工’은 천天과 지地를 연결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夫’는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갑골문에서는 농기구를 가진 성인 남자로 그려져 있습니다. 인문학의 문 文은 문 紋(무늬)과 같은 뜻입니다.
자연이란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이 한다는 뜻입니다. 농기구로 땅을 파헤쳐 농사를 짓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연,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인식과 자기성찰이 공부입니다.
옛날에는 공부를 구도 求道라고 했습니다. 구도에는 반드시 고행이 전제됩니다. 그 고행의 총화가 공부입니다.
공부는 세계와 인간을 잘 알기 위해서 합니다. ‘잘’ 알기 위해서는 사실과 진실, 이상과 현실이라는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추상력과 상상력의 조화입니다. 추상은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압축하는 것이고, 상상력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문사철 文史哲이 바로 개념과 논리로 압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가장 필요한 능력이 추상력입니다.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는 추상력이 긴급히 요구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핵심을 요약하고 추출할 수 있는 추상력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문제를 옳게 제기하면 이미 반 이상이 해결되고 있다”고 합니다.
추상력과 나란히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작은 것, 사소한 문제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한 마리의 제비를 보면 천하에 봄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이 두가지 능력, 문사철 文史哲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적절히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문사철과 시서화를 함께 연마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아울러 연마하게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추상력과 상상력을 하나하나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적절히 배합하여 구사할 수 있는 유연함입니다. 그런 공부가 쉬운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러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고 思考의 문제가 아니라 품성 品性의 문제입니다. 생각하면 시적 관점과 시적 상상력이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이공계나 자연과학 전공자들이 구사하는 언술의 특징은 더 많은 팩트를 제시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주장에 도움 되는 더 많은 팩트를 쌓아가는 방식입니다. 수평면을 확장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의 언술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 주장을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 대비함으로써 그것의 특징을 부과시키기도 하고, 시간적 변화 속에 그것을 배치함으로써 그 의미를 확장하고 시각화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마치 시적 관점처럼 동서남북 춘하추동의 다양한 시각에서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시 詩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언어의 왜소함입니다. 그 왜소함을 뛰어넘는 다양한 방식을 승인하는 것이 어쩌면 시적 레토릭(rethoric 수사법)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레토릭을 다앙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귀가 어둡다’고 하고 ‘눈이 높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적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지금은 시 읽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암송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노래는 물론 많이 하지만, 노래는 이미 시가 아니겠끔 바뀌고 말았습니다.
초등학생들과 시 암송 모임을 하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비싼 과외 못하는 애들을 모아 놓고 시를 암송하는 공부 모임입니다. 그중 한 아이의 학교 소풍 때였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앞에나와서 각기 장기자랑을 하는 순서였다고 합니다. 다른 애들은 나와서 유행가도 부르고 유명 그룹의 춤도 멋지게 흉내 내는 등 화려한 장기자랑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 아이 차례가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시 암송 모임에서 공부한 윤동주의 「서시」를 암송했다고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놀랍게도 그것이 그날을 석권했음은 물론이고 그후 그 가난한 아이가 일약 스타가 되었다고 합니다.
시가 없어지는 세월 속에서 우리가 시를 멋지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신영복, 「담론」 중에서
[출처] 문사철 文史哲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작성자 빛 따라 길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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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종교
Religion 과목 3개 수강 후: “종교”수업은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관점을 가르친다. 기독교인의 성경은 어떻고 이슬람의 역사를 배우는 게 아니라 세상의 다양한 세계관과 왜 그러한 시각을 갖게 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학문이다. “종교” 수업을 통해서 물론 “신”에 대해서도 말하지만(미국계 독일인 철학자인 Paul Tillich에 따르면 “신”이란 알려고 할수록 더 모른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하루하루 개인이 속함 세상을 바라보는 이해의 틀을 교육하는 학문이라 인생을 고속도로라고 한다면 내가 타고 있는 차, 자동차 운전법, 교통법, 옆 차 운전자와의 심리전이 아니라 내가 달리고 있는 그 아스팔트 바닥을 재건해주는 학문인 것이다.
고등학교 때 철학 전공한다는 아이 있어서 “철학하면 이름 짓는 거야?(철학관=이름 지어주는 곳이라고 생각함)이라고 물어봤던 내가 황당스럽다.. 무식했어라. 인트로 수업이라 거의 겉핥기 하고 있는 거겠지만 존 롤스, 데카르트, 노직, 등 큰 줄기를 맛본 현재 내가 생각하기에 철학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어떻게 가장 효율적으로 잘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토론하는 학문 같다. 그런데 철학은 애초에 사고 과정부터 검열하고 논리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좇는 지능적 운동인 것 같아 사실상 ‘생각’을 항상 하는 인간이라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과학, 예술 등 모든 인간 활동에 적용될 수 있는 사고의 회로를 논리 정연하게 다듬어주는 기능적 훈련과정인 것 같다.
특정하게 겉으로 드러난 학문이라기보다 인간의 사고 활동 과정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비슷할 수 있겠지만 철저히 '생각하는 과정'이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철학이 종교를 포함하고 있으며 종교는 '생각하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훈련시키는 학문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개인의 세계관, 가치관을 공부한다는 데에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존 롤스의 정의사회, 벤담, 밀의 공리주의를 읽으면서 내가 막연히 바랬던 무정부주의(anarchism)에 대한 갈망이 더 커졌으나 이에 대해 support 하려면 먼저 정치, 사회 포함한 철학을 좀 더 깊이 파야 논리적으로 근거를 제시할 수 있겠다.
여기에다 추가로 종교적, 신학, 영적 관점까지 추가한다면 무언가 새로운 발견이 나올 것 같다.